일본은 벌써18명···기초 기술연구없이 진정한 선진국 되기 어려워
[Focus] 한국은 왜 노벨과학상 못 받지?…기초 과학 후진국 언제 벗어나나
해마다 10월 초가 되면 세계의 과학자들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운다.

노벨상이 이때쯤 이면 발표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학자들도 혹시 올해에 우리 과학자가 노벨상을 탄다는 소식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가진다.

더욱이 과학과 다른 문학부문에서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자 과학 분야에 대한 노벨상 관심도 예년과 달랐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과학상뿐 아니라 문학상도 다른 국가에 돌아갔다.

노벨 과학상(물리학상 · 화학상 · 생의학상)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정치 역학적 문제가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없는 대표적인 상이다.

그런데 한국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한국전력 두산중공업 등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노벨상을 못 타는가?

노벨 물리 · 화학상의 경우 기초과학 분야에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국내 현실을 감안할 때 아직 후보군에 오를 만한 인물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냉정히 말해 근대적 산업발전의 역사가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아래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생긴 게 1968년이다.

소위 '산업혁명'으로 19세기부터 길을 닦은 선진국보다는 한참 못 미친다.

유럽 등 선진국이 산업혁명을 겪을 때, 우리는 사실 청나라의 속국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폐허 속에서 '잘 살아보자'라는 국가적 집념 하에 소위 '추격성장'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기초기술 연구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기초기술은 이미 정립된 것을 받아들이고,그에 대해 응용을 해서 많이 '팔 수 있는' 공학이나 응용기술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2명은, 사실 김필립 미 컬럼비아대 교수와 연구를 같이 한 인물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교수는 2004년 그래핀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지만, 2005년 응용 기술을 발표할 때는 김 교수의 도움을 크게 얻었다.

그래핀은 흑연의 표면층을 한 겹 벗긴 탄소 나노물질로,미래의 정보기술을 이끌 신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결국 노벨상 수상자에서 김 교수는 빠졌다. 김 교수는 그래핀을 세상에서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벨 물리 · 화학상 수여에서 중요한 평가요소 중 하나는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논문 건수와 피인용도인데 이 가운데서는 피인용도가 더 중요하다.

양적인 게재 건수에서는 우리도 상당 수준에 이르러 2007년 SCI 논문 게재 건수가 세계 1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SCI 논문 피인용도는 세계 30위에 그쳤다.

그동안 노벨 물리학상 수상 사례를 보면 새로운 현상이나 실험 기법 발견이 69회,이론 · 실험적 검증은 32회로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보통 30~40대에 중요한 논문을 쓰고 이 업적으로 60~70대 이후에 노벨상을 수상한다.

결국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성과를 내고, 이것이 수십년을 걸쳐 산업발전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스승이 개발한 기법을 제자가 이어받아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 세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장기간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안드레 가임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의 경우도 사제지간이다.

수상자 간 사제 관계는 4 · 5대까지 계보가 형성되기도 한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페르미의 경우는 6명의 제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이 같은 장기적인 학문적 풍토가 비교적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네기시 에이이치 미 퍼듀대 교수, 스즈키 아키라 일본 홋카이도대 교수를 배출하면서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는 총 18명이 됐으며 노벨 화학상 수상자만 해도 7명이다.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이 최근 펴낸 '일본의 기초 연구 진흥 정책과 산학연 역할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과학자들의 노벨상 수상에 기여한 논문은 주로 30대에 발표됐다는 것이다.

일본 문부과학성 과학기술백서(2007년)를 보면 1986년에서 2006년까지 노벨 화학 · 물리 · 생리의학상 수상자 137명 중 48%에 해당하는 66명이 30대의 연구 결과로 수상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또 일본의 박사 후 과정에 대한 정책 및 자금 지원 확대 방안과 '신 테뉴어 트랙제도' 등도 주목할 만하다.

2009년 현재 일본 34개 대학이 실시 중인 '신 테뉴어 트랙제도'는 대학에 채용되는 신진 연구자를 국가가 결정해 3~5년 정도 연구비와 급여를 지원해 해당 대학에서 독립적인 연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 뒤 이후 대학이 독자적으로 최종 정년직 채용을 결정하도록 한다.

이리저리 눈치볼 것 없는 능력있는 신진 연구자의 초기 일자리와 연구비를 정부가 일정 기간 안정적으로 지원해줌으로써 대학과 연구진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제도인 셈이다.

또 보고서는 국가 기초연구는 장기적 방향성을 가진 산학연 각각의 노력으로 활성화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남표 KAIST 총장이 '젊은 석좌교수' 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같은 트렌드에 불을 지핀 바 있다.

연구의 파급효과가 10~20년 정도를 두고 더 증명돼야 하지만,과학계는 그나마 현재로서 한국에서 가장 노벨상에 견줄 만한 세계적 성과를 낸 국내 과학자로 유룡 KAIST 화학과 교수,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등을 꼽는다.

유 교수는 다양한 석유화학 공정의 촉매로 쓰이는 '제올라이트'분야 등에서 세계적 업적을 쌓았으며,김 교수는 생명현상의 근원을 밝혀 줄 것으로 기대되는 '마이크로 RNA' 분야 연구에서 세계적 명성이 높은 편이다.

또 해외에서 활약하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의 활동도 기대해볼 만한 대목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노벨상 수상이 먼 미래의 얘기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해성 한국경제신문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