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육, 제육볶음, 감자, 김치, 배추, 고추, 후추.' 이들 말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음식 이름 또는 그 재료가 되는 식물 이름이라 답한다면 그는 우리말에 관해 별로 관심 없는 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붓, 호리병, 지렁이, 사냥, 맹세, 체신머리, 얌체, 상투, 붕어, 초승달, 짐승, 이승/저승, 챙, 보살, 모란, 벽창호 …….'
제각각의 말인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게 있다.
그것은 모두 한자어에서 변한 말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본래 한자어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음운 변천을 일으켜 지금의 형태로 굳어진 말들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고유어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한자를 빌려 표기하다 보니 마치 원래 한자에서 온 말인 양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말도 많다.
가령 '주전자나 남편, 야단법석, 편지, 야속하다, 부실하다' 같은 말은 우리 고유어일까 한자말일까.
사전에서는 이들을 주전자(酒煎子), 남편(男便), 야단법석(野壇法席), 편지(便紙/片紙 ), 야속(野俗)하다, 부실(不實)하다 등으로 올려 한자말임을 드러내고 있다.
원로 언론인이면서 우리말 연구가인 정재도 한말글연구회 회장은 우리 국어사전들의 이런 편찬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 글자가 없던 옛날에는 한자를 이용해 소리를 옮기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취음(取音)이다.
취음은 우리말을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음을 취하여 한자로 적는 것인데 간혹 이를 원말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酒煎子니 男便이니, 野壇法席이니, 便紙/片紙니, 野俗하다니, 不實하다 따위의 단어가 그런 것인데 이는 취음일 뿐 본래 말이 아니라는 게 정재도 선생의 주장이다.
가령 '부실하다'의 경우, "북한 《조선말대사전》에 '부실하다'를 한자 없이 우리말로 다루어 '
①다부지지 못하다
②정신이나 행동이 모자라다
③실속이 없다
④충분하지 못하다
⑤넉넉지 못하다
⑥미덥지 못하다'처럼 풀어 놓았는데 남한 사전들은 이 우리말 '부실하다'에 말밑으로 不實을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실하다'와 不實은 다른 말이다.
'부실하다'는 '튼실하다'의 상대말이고, '불실(不實)'은 '결실(結實)'의 상대말로 '불실과(不實果)'에나 쓰인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사전에서 잘못 올린 이런 말들을 모아 취음의 한자는 본래 의미를 지닌 게 아니므로 이젠 버려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주전자나 남편, 야단법석, 편지,야속하다,부실하다 같은 말은 우리 고유어이므로 한글로만 적어야 하고 한자는 단지 과거에 취음으로 이용하던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조선어사전》을 내면서 한자말은 없는 것까지 만들어 싣고, 우리말은 있는 것도 싣지 않고 한자말로 둔갑시켰다.
이로 인해 지금 우리말에서 한자어와 고유어가 70%와 30%로 꾸며졌다"는 정재도 선생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즐겨 먹는 '수육'은 물론 한자어 '숙육(熟肉)'이 변해 고유어처럼 굳어진 말이다.
이 말의 최근 국어사전 풀이는 '삶아 내어 물기를 뺀 고기'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육'은 '삶아 익힌 쇠고기'로 설명됐었다. 그러다 보니 '돼지고기 편육' 같은 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편육(片肉)'이란 '얇게 저민 수육'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육이 '삶아 익힌 쇠고기'로 풀이되는 한 현실적으로 많이 쓰이는 '돼지고기 편육'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수육'의 풀이를 바꾼 데는 이 같은 현실언어의 흐름을 반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육볶음'은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을 넣어 볶다가 다시 부추와 함께 볶은 음식을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돼지고기볶음'으로 순화했다.
하지만 시중에서는 여전히 '제육볶음'의 쓰임새가 훨씬 더 활발하다.
'제육'은 돼지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도 '돼지고기'로 순화했는데, '제육'은 '저육(猪肉)'에서 온 말이다.
지금은 어원 의식이 거의 없어져 우리 고유어처럼 느껴지는 김치, 배추, 고추, 후추 따위의 말도 모두 한자어가 바뀐 것이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고추는 '고초(苦椒)'에서, 후추는 '호초(胡椒)'에서 형태가 변한 것이다.
성장기간이 짧으면서 비교적 찬 기후에서도 잘 자라 예전에 구황작물로 가꾸었던 감자 역시 '감저(甘藷)'가 원말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음식 이름 또는 그 재료가 되는 식물 이름이라 답한다면 그는 우리말에 관해 별로 관심 없는 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붓, 호리병, 지렁이, 사냥, 맹세, 체신머리, 얌체, 상투, 붕어, 초승달, 짐승, 이승/저승, 챙, 보살, 모란, 벽창호 …….'
제각각의 말인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게 있다.
그것은 모두 한자어에서 변한 말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본래 한자어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음운 변천을 일으켜 지금의 형태로 굳어진 말들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고유어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한자를 빌려 표기하다 보니 마치 원래 한자에서 온 말인 양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말도 많다.
가령 '주전자나 남편, 야단법석, 편지, 야속하다, 부실하다' 같은 말은 우리 고유어일까 한자말일까.
사전에서는 이들을 주전자(酒煎子), 남편(男便), 야단법석(野壇法席), 편지(便紙/片紙 ), 야속(野俗)하다, 부실(不實)하다 등으로 올려 한자말임을 드러내고 있다.
원로 언론인이면서 우리말 연구가인 정재도 한말글연구회 회장은 우리 국어사전들의 이런 편찬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 글자가 없던 옛날에는 한자를 이용해 소리를 옮기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취음(取音)이다.
취음은 우리말을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음을 취하여 한자로 적는 것인데 간혹 이를 원말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酒煎子니 男便이니, 野壇法席이니, 便紙/片紙니, 野俗하다니, 不實하다 따위의 단어가 그런 것인데 이는 취음일 뿐 본래 말이 아니라는 게 정재도 선생의 주장이다.
가령 '부실하다'의 경우, "북한 《조선말대사전》에 '부실하다'를 한자 없이 우리말로 다루어 '
①다부지지 못하다
②정신이나 행동이 모자라다
③실속이 없다
④충분하지 못하다
⑤넉넉지 못하다
⑥미덥지 못하다'처럼 풀어 놓았는데 남한 사전들은 이 우리말 '부실하다'에 말밑으로 不實을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실하다'와 不實은 다른 말이다.
'부실하다'는 '튼실하다'의 상대말이고, '불실(不實)'은 '결실(結實)'의 상대말로 '불실과(不實果)'에나 쓰인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사전에서 잘못 올린 이런 말들을 모아 취음의 한자는 본래 의미를 지닌 게 아니므로 이젠 버려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주전자나 남편, 야단법석, 편지,야속하다,부실하다 같은 말은 우리 고유어이므로 한글로만 적어야 하고 한자는 단지 과거에 취음으로 이용하던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조선어사전》을 내면서 한자말은 없는 것까지 만들어 싣고, 우리말은 있는 것도 싣지 않고 한자말로 둔갑시켰다.
이로 인해 지금 우리말에서 한자어와 고유어가 70%와 30%로 꾸며졌다"는 정재도 선생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즐겨 먹는 '수육'은 물론 한자어 '숙육(熟肉)'이 변해 고유어처럼 굳어진 말이다.
이 말의 최근 국어사전 풀이는 '삶아 내어 물기를 뺀 고기'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육'은 '삶아 익힌 쇠고기'로 설명됐었다. 그러다 보니 '돼지고기 편육' 같은 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편육(片肉)'이란 '얇게 저민 수육'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육이 '삶아 익힌 쇠고기'로 풀이되는 한 현실적으로 많이 쓰이는 '돼지고기 편육'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수육'의 풀이를 바꾼 데는 이 같은 현실언어의 흐름을 반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육볶음'은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을 넣어 볶다가 다시 부추와 함께 볶은 음식을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돼지고기볶음'으로 순화했다.
하지만 시중에서는 여전히 '제육볶음'의 쓰임새가 훨씬 더 활발하다.
'제육'은 돼지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도 '돼지고기'로 순화했는데, '제육'은 '저육(猪肉)'에서 온 말이다.
지금은 어원 의식이 거의 없어져 우리 고유어처럼 느껴지는 김치, 배추, 고추, 후추 따위의 말도 모두 한자어가 바뀐 것이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고추는 '고초(苦椒)'에서, 후추는 '호초(胡椒)'에서 형태가 변한 것이다.
성장기간이 짧으면서 비교적 찬 기후에서도 잘 자라 예전에 구황작물로 가꾸었던 감자 역시 '감저(甘藷)'가 원말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