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하락 추세
[Cover Story] 이상기후와 투기자금이 국제 곡물 가격 부추겨
"집에 설탕단지가 있다면 지금 채워 두라."

세계적 상품투자 전문가 짐 로저스의 말이다.

농산물 부족 사태는 필연적 결과이며 앞으로도 더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세계적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만들어 10년 동안 4000%가량의 수익률을 올린 그의 말은 요즘 거의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최근 두 달 새 80%가 넘는 폭등을 보인 밀 가격이 대표적이다.

곡물 가격은 앞으로도 통제 불능의 상황을 자주 연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치솟고 있다.

농산물 가격이 모든 물가를 끌어올리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는 그래서 나온다.

물론 그의 이 같은 주장은 농산물 가격이 오르는 시기에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은 장기적으로 그다지 많이 오르는 상품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 증거들도 많다.

석유나 농산물 등을 1차 상품이라고 하는데 1차 상품 중 특히 농산물 가격은 산업화 이후 200~30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강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녹색혁명으로 이름 지어 부르는 20세기의 농업혁명도 농산물 증산을 통해 인류가 오랜 기아의 운명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지구적 차원에서 굶주리는 인구 수가 줄어 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식량이나 농산물 시장에 대해 공부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농산물 가격 급등을 알리는 신문 기사들은 대부분 매우 자극적인 제목을 뽑는다.

당장 우리의 식탁이 위협받고 자칫 굶는 사람이 급증할 것처럼 하지만 이런 소동은 곧 잠잠해진다.

최근의 농산물 시장이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투기 자금들이 농산물 시장으로 대거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산물은 특성상 단기적인 증산이 어렵고 기후 등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 때문에 시차를 노린 투기자본이 몰려들기에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이런 사정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 금세 기아가 닥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농산물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농산물 가격 급등에 대해 공부해보자.

◎ 농산물의 적 '이상기후'

밀 등 주요 농산물 가격 급변의 근본적인 원인은 날씨다.

이상기후에 따른 생산량 감소 우려가 농산물 선물 가격을 밀어올리고,이것이 현물가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구도다.

문제는 가격불안감이 사재기 욕구를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농산물이 대표적인 위험상품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러시아는 올 들어 130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 이상기후로 러시아 밀 농장의 3분의 1 이상이 파괴됐다는 관측(월스트리트저널)도 나온다.

유럽 지역도 4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와 가뭄이 겹쳐 농작물 작황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반면 곡창지대인 중국 서북부와 인도,파키스탄 등에서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적도 근처인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등 남미지역에는 때아닌 한파가 덮쳤다.

동사자만 200명이 넘었을 정도로 예상키 어려운 한파였다.

지구촌 기상이변은 1980년대 한 해 12.7건이던 것이 1990년대 19.2건으로 늘었고,2000년대 들어서는 2008년 한 해에만 24.5건을 넘어서는 등 발생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이상기후는 생태계 교란을 불러온다.

이는 결국 농작물 생육 부진과 수확량 감소로 이어진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올해 세계 밀 예상 수확량을 당초 6억7600만t에서 6억5100만t으로 3.7% 하향 조정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등 동유럽 주요 밀 곡창지대의 가뭄이 주요 원인이란 설명이다.

◎ 거대 투기자본

고수익이 있는 곳에는 늘 투기세력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특히 가격변동폭이 큰 농산물은 이들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2008년 애그플레이션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곡물 생산량은 크게 감소하지 않았음에도 밀과 옥수수 쌀 등 주요 곡물가격은 단기간에 3~4배나 폭등했다.

(물론 나중에는 다시 큰 폭으로 떨어졌다)

식용 곡물보다는 바이오에탄올 등 신재생에너지의 원료용으로 곡물 수요가 증대해 가격이 높아질 것이란 기대심리로 투기성 자본이 집중적으로 몰려든 결과다.

지금도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풀린 시장의 풍부한 유동자금이 대거 유입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등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다소 수그러들면서 유로화가 다시 강세를 보이자 외환시장에 몰렸던 단기투기자금이 농산물 시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농산물은 품목별로 다양한 투기시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생글 독자 여러분이 나중에 농산물 분야에서 큰 장사꾼이 된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우주에 떠있는 위성을 통해 전 지구의 기후를 분석하고 작황을 조사한 다음 밀이나 옥수수 쌀 포도 등의 가격이 크게 변할 것으로 예상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자금을 총동원해 세계적 투자에 나설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런 농산물 투자 기회를 대부분 미국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는 펀드들도 있지만 카길이나 몬산토 등 농산물 분야의 큰손들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종합상사들도 이 시장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국제적 규모의 농산물 거래 기업이 없다. 생글이 여러분이 도전해 보시기를.

◎정치도 변수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또 다른 원인은 정책적 변수다.

자원 무기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식량을 최대한 비축하려는 세계 각국 정부의 움직임이 곡물 및 농산물 유통시장을 흔들 수 있는 절대적 변수로 떠오른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2008년 애그플레이션 당시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방글라데시 아이티 소말리아 등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난 이후 한층 심화됐다.

사상 최악의 산불과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러시아가 올해 곡물 수출을 전격 금지한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는 전체 농산물 수출의 절반을 통제할 수 있는 대형 무역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가격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전략에서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세계 곡물의 '블랙홀'로 꼽히는 중국까지 식량자원 확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곡물업계에선 중국의 탐식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 애그플레이션 진짜 올까

농산물 가격 예측은 어떤 상품보다 어렵다.

변수인 날씨가 워낙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그만큼 농산물 수급 전망도 쉽지 않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러시아 가뭄이 상당기간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세계 농산물 공급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단 재고가 워낙 많이 쌓여 있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올해 밀 재고율은 28%로 2006~2007년의 20.3%, 2007~2008년의 19.9%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인도 전역만 최대 5400만t의 밀이 재고로 쌓여 있는 상황이다.

미국(3000만t)의 두 배에 육박하는 물량을 비축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인도 등 두 곳의 곡물유통업자들이 시장에 재고를 풀어놓을 경우 곡물가격은 하향 압력이 커지고 공급 부족 사태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보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 가능성을 낮게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유가다.

2007년 배럴당 50달러대였던 유가는 2008년 150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로 인해 대체에너지인 바이오에탄올 원료로 옥수수가 사용되면서 곡물가격 폭등의 발단이 됐다. 현재 원유 가격은 80달러 선이다. 러시아는 상황이 안 좋지만 미국과 캐나다 중국 등은 작황이 나쁘지 않아 러시아와 기타 자연재해 국가들의 생산감소분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다만 곡창지대를 휩쓸고 있는 홍수와 가뭄 등 이상기후가 겨울밀 파종기까지 지속될 경우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겨울밀이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량이 더 떨어질 경우 미국 등의 재고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게 된다.

이관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