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호 2011학년도 건국대 모의논술문제 해설
[생글 논술 첨삭노트] (24) 각 제시문을 비교할 수 있는 공통된 질문을 찾아라
대부분의 학생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관계'라는 단 두 글자였습니다.

문제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진실과 주관의 관계를 밝히시오>라고 했으니 관계를 밝혀야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 있는 관계를 지칭할 수 있는 명사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아마 실제로 이 모의고사를 봤던 많은 학생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논제 자체가 명확하지 못했다고 할까요?

차라리 비교하라고 했으면 정직한 독해문제가 되었을 테니 말이죠.

어찌됐든 세 제시문을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질문을 찾으라고 한다면

"과연 주관이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 정도가 되겠네요.

이에 따라서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오히려 진실을 왜곡, 훼손한다는 (가)와, 주관이 개입되어야 비로소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나), 주관은 마치 매트릭스 같아서 진실과는 어떠한 관계인지 증명할 수 없다는 (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분량 관계로 긴 해설을 드리지 못하는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신 해설서에는 3번 문제의 해설과 예시답안까지 넣어놓았으니 집에서 혼자서 연습하기 좋을 겁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이 문제와 유사한 문제로는 2009년도 연세대 모의논술고사 문제와 2008학년도 건국대 수시1차 기출문제가 있습니다.

도저히 속이 시원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 두 문제를 풀어보시는 것이 좋겠군요.

다음은 문제에 대한 예시 답안입니다.

"각 제시문들은 주관과 진실의 관계에 따라 반비례(=길항=대립)적이라고 보는 (가), 비례적이라고 보는 (나), 독립적이라고 보는 (다)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연역추리가 언어적 표상을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착안한 제시문 (가)는 언어를 통한 일반화가 인간 문명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을 주관적 관념의 동굴 안에 갇히게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주관으로 인해 진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 반비례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제시문 (나)는 주관과 진실이 비례관계에 있다고 본다.

제시문 (나)에 의하면 단순한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윤봉길 의사가 테러리스트가 되듯, 사태나 사건의 배후에 있는 배경을 주관을 통해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고도의 주관이야말로 진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와 상관없이 제시문 (다)는 애초에 주관과 진실이 독립적인 관계라고 본다.

우리의 두뇌가 인식하는 감각이나 사태는 환상에 불과할 수 있으므로, 진실은 주관의 작용과 전혀 상관없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 (혜성여고 박다은 학생)



⊙ 실전문제

이번 주 문제는 2010학년도 숙명여대 수시 2차 기출문제 중 1교시 두 번째 세트문제입니다.

지금은 400자 문제이지만, 실제로 숙대는 800~900자 문제가 있습니다.

숙대를 준비하는 학생의 경우 긴 글쓰기를 나름대로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에 대한 학생글은 8월15일(日)까지 sgsgnot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대신 첨부파일을 이용하지 말아주세요. )

글을 보내주신 모든 학생에게는 친절한 해설서를 보내드립니다.

또한, 기초/중급/고급 논술교재 필요하신 분도 메일주세요.

다음 주면 10개의 해설서가 묶인 교재를 추가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든 교재 신청이든 메일을 보내주실 때는 학교/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같이 써 보내주세요.

[문제] 제시문 <나>의 관점에서 제시문 <가>의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 대하여 평가하시오.
(400자 40분)


나는 아주 단순한 세상을 그렸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보다도 단순했다.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었다면 아버지는 50억 광년 저쪽에 있다는 머리카락좌의 성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쌍한 아버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몸은 화장터에서 반 줌의 재로 분해되고, 영호와 나는 물가에 서서 어머니가 뿌려 놓는 재를 보며 울었다.

난장이 아버지가 무기물로 없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생명을 갖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적았을 리는 없다.

아버지는 몸보다 컸던 고통을 죽어서 벗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없었다.

학교에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

우리집에 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 본 적도 없었다.

영양 부족으로 일어나는 이상 증세를 우리는 경험했다.

단백질의 부족이 빈혈 · 부종 · 설사를 부르고는 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잃었다.

그래서 말년의 아버지는 자기 시대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 시대의 여러 특성 중의 하나가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의무만 강요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경제 · 사회적 생존권을 찾아서 상처를 아물리지 못하고 벽돌 공장 굴뚝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날아 들어갈 벌도 없다. 나비도 없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유토피아주의는 합리주의의 한 형태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 유토피아주의가 나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합리주의와는 아주 다른 형태의 합리주의라는 것을 밝혀야겠다.

우선 우리의 모든 정치적인 행위가 기여해야 하는 목적으로서 어떤 사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선정하는 유토피아적인 방법은 폭력을 낳기 쉽다는 것을 나는 다음과 같이 논증할 수 있다.

정치적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을 과학적으로나 완전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태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의견의 다양한 차이는 논증의 방식으로는 언제나 제거할 수 없다.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이와 같은 의견 차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인 의견 차이의 성격을 띨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이한 유토피아적인 여러 종교 간에는 어떠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유토피아적인 목적은 합리적인 정치적 행위와 논의의 기초 구실을 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으므로 유토피아주의자는 자신과 동일한 유토피아의 목적을 공유하지 않는, 즉 자신과 동일한 유토피아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경쟁 상대는 설득해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거나 분쇄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적인 목표의 길은 멀고,그의 정치적인 행위가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경합하고 있는 여러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분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모든 기억을 가능한 한 근절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토피아의 건설기가 사회 변혁의 시기가 되기 쉽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합하는 목적을 억압하기 위한 폭력적 방법의 사용은 더욱 절박하게 요구된다.

이러한 변혁기에는 생각도 변하기 쉽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적인 청사진이 결정된 시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유토피아로의 접근 전체가 좌절될 염려가 있다.

또한 우리 자신들이 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치렀을 일체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아무데도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우리가 새로운 목적에 맞추어서 방향을 바꾼다 해도 우리는 다시 전과 똑같은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 변경을 피하기 위해서는 폭력-그것은 선전, 비판의 억압, 모든 반대파의 전멸을 포함한다- 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와 함께, 유토피아의 계획자들과 그 유토피아적인 청사진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유토피아 기사들은 예지와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는 단언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유토피아 기사들은 전지전능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신이 된다.

그대들은 그들 외에 다른 어떤 신도 섬길 수 없으리라!

이용준 S · 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