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소련·중국 등에 업고 남침 도발··· 한국, 6·25전쟁 상처 딛고 선진국 도약
[Focus] 60년 6월 25일, 어떤 일이?··· 330만명 목숨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
북한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남침을 시작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는 탱크와 자주포들이 국군의 방어 진지를 향해 돌진해 왔지만 한국은 이를 막을 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국군병사들은 북한군 전차에 올라가 전차 내부에 화염병을 던지기도하고 폭탄을 등에 멘 채 육탄으로 전차를 향해 돌격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로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에 밀려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남으로 밀려왔다.

북한군은 7월 중순 서쪽으로는 금강에 도달했고 중부로는 충주 이남,동쪽으로는 경북 영덕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8월 초에는 남한 영토의 90%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목숨을 건 항전으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더 이상 뚫지 못했다.

9월 초부터 2주일 동안 전개된 북한군의 공세는 너무 치열해 당시 발생한 인명손실은 6 · 25 전쟁 전 기간을 통해 단위시간에 발생한 손실 중 최고를 기록했다.

9월 초의 위기를 넘긴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 9월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한 뒤 여세를 몰아 평양을 함락하고 10월 말 께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뒤바뀌어 1951년 1월4일 서울은 재차 인민군에 점령당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반격을 가해 1951년 초여름에는 38도선 일대에서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이 유엔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 옴으로써 유엔군과 북한군 중국군 사이에 휴전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의 휴전안에 반발해 1953년 6월18일 반공 포로를 석방했으나 미국으로부터 한 · 미 상호 방위조약의 체결과 장기간 경제원조 및 한국군의 증강 등을 약속받고 휴전에 동의함으로써 마침내 휴전이 성립되었다.

⊙ 전쟁의 영향

3년간 지속된 6 · 25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유엔군과 북한이 종전 협정을 맺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제법상 전쟁이 일시 중단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가해자인 북한은 6 · 25전쟁을 일으킨 1950년 당시 더 절박하고 궁핍한 삶을 구차하게 살고 있는 나라로 전락했다.

반면 피해자인 한국은 세계의 최빈국에서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발전된 나라가 되었다.

전쟁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어떤 역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그 결과 20세기에서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전쟁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습득했던 것이다.

우선 6 · 25전쟁은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현대 국가의 기본 틀을 갖추도록 했다.

특히 군대가 재정비됐다. 군대는 근대화 과정에서 첨병 역할을 했다. 미국과 동맹국 관계도 이어가는 기틀이 됐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과의 동맹은 자유 진영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회문화의 변화도 나타났다.

인구의 급격한 이동과 변동으로 지방의 전통문화가 무너졌으며 권위질서가 붕괴되고 촌락 공동체 의식이 약화됐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가 6 · 25 전쟁으로 인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