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기지 문제·정치자금 의혹에 발목···오자와 간사장도 동반퇴진

[Global Issue] 하토야마 日총리, 아마추어 리더십으로 1년도 못 채우고 하차
지난해 9월 5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일구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오키나와현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정치자금 의혹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지난 2일 발표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날 의회에서 열린 민주당 중 · 참의원 의원총회에 참석, "정치자금 의혹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주고,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사민당이 연립정부에서 이탈한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작년 8 · 30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자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취임했다.

그러나 정치적 리더십 부족과 정책 혼선,국민과의 소통 부족 등으로 우왕좌왕한 끝에 8개월여 만에 하차하게 됐다.

취임 당시 70%를 넘던 내각 지지율이 최근 10%대로 떨어지면서 사퇴 압력이 높아졌다.

하토야마 총리는 1일 오후까지도 '총리직에서 사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당 내 반발에 결국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하토야마 총리와 함께 불법 정치자금 의혹으로 사퇴 압력을 받아온 민주당 최고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작은 사진)도 동반 퇴진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권력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4일 후임 총리에 오를 당 대표를 선출하고,8일 내각 진용을 새로 짜기로 했다.

후임 총리로 유력한 간 나오토 부총리 겸 재무상은 이날 민주당 대표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하토야마 내각의 '2인자'로 1996년 하토야마 총리와 함께 민주당을 결성한 창당 멤버다.

간 재무상이 유력시되는 것은 민주당 내 최대 계파인 오자와 간사장과 관계가 무난하기 때문이다.

'오자와파'에는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을 합해 150여명의 의원이 속해 있다.

민주당 전체 의원 420여명의 35%다.

오자와 간사장은 하토야마 총리와 함께 간사장직에서 동반 사퇴하지만 후임 총리 인선에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관측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전격 사퇴로 일본 경제는 또 하나의 시름을 안게 됐다.

내수 침체로 인한 디플레이션과 도요타 리콜사태 이후의 자신감 상실에 '정치 혼란'이라는 악재가 더해졌다.

최근 수출 증가로 그나마 숨통을 트려던 경제가 정치 리더십 변화라는 불확실성 때문에 다시 움츠러들지 않을까 일본 경제계는 우려하고 있다.

실제 2일 오전 10시,하토야마 총리 사임 발표 직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미 달러화에 대한 엔화가치는 91.37엔으로 전날 뉴욕외환시장의 90.94엔에서 0.43엔 떨어졌다.

유로화에 대해서도 전날 111.22엔에서 111.78엔으로 가치가 하락했다.

주가도 떨어졌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전날보다 1.1%(108엔) 떨어진 9603.24엔으로 마감했다.

시장 관계자는 "정치불안이 일본 경제에 대한 신뢰를 깎아내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취임 8개월여 만에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문제와 정치자금 의혹이 결정타였다.

일본은 2006년 미국과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를 같은 오키나와 내 나고시 캠프슈워브 연안지역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총리는 작년 총선 때 이를 뒤집고 후텐마 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현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통해 미국과 동등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겠다는 게 하토야마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어떤 지방자치단체도 미군 기지를 받겠다는 곳이 없었고,미국과는 신뢰관계에 금이 갔다.

하토야마 총리 퇴진을 지켜보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반응은 역대 어느 일본 총리의 교체 때보다도 신중하다.

내각제라는 정치 체제 특성 때문에 동맹국인 일본의 잦은 총리 교체는 미국으로서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하토야마 총리의 경우 취임 초부터 '대미 의존외교 탈피','대중(對中) 관계 강화' 외교 노선을 주창했다.

특히 후텐마 기지 이전을 놓고 미국과의 갈등이 첨예했던데다,퇴진의 결정적인 계기로 후텐마 문제가 꼽히기 때문에 여느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미국과의 외교문제가 결국 총리 교체라는 일본 국내 정치 격변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로서는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일본 전문가로 정치전문 블로그 '워싱턴 노트'를 운영하는 스티븐 클레몬스는 "오바마가 하토야마를 퇴진시켰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하토야마는 자신을 냉대해왔던 오바마 대통령의 압력을 결국 버텨내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정치자금 문제도 큰 부담이었다.

모친에게서 10억엔(약 130억원)의 정치자금을 받고도 이를 허위 기재한 게 들통나면서 여론의 반발을 샀다.

후텐마 기지에다 정치자금 문제로 흔들린 하토야마 내각은 출범 때 70%를 넘던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졌다.

이대로는 다음 달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가 불가피했다.

일본 민주당은 자민당의 반세기 장기 집권을 작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뒤집어 정권교체를 했다.

새로운 정치에 일본 국민들의 기대도 컸다. 그러나 하토야마 정권이 임기 4년은커녕 1년도 안 돼 퇴진하면서 실망감도 크다.

일각에선 총리들이 1년도 못 채우고 연속 교체되던 자민당 정권 말기와 다를 게 뭐냐는 비판도 나온다.

경제계의 우려가 특히 심각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장기 내수침체와 도요타 리콜 사태 등으로 국민들의 일본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약해진 상황"이라며 "정치가 성장정책을 제시하고 경제를 주도해도 모자랄 판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관계자는 "국가의 비전을 보여줘야 할 정치가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라고 진단했다.

하토야마 총리 사퇴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한 · 일 자유무역협정(FTA) 조기 추진 등 한국에 대한 일본의 외교정책기조에는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일본 정부의 대(對) 한반도 정책은 하토야마 총리 개인보다는 민주당의 정강정책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특히 후임 총리로 유력한 간 부총리 등 민주당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 한국과 외교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과거사 청산 의지도 공유하고 있다.

총리 후보에 포함되는 마에하라 세이지 국토교통상은 민주당 내 '전략적 한 · 일관계를 구축하는 의원 모임' 회장을 맡고 있어 친한파로 분류된다.

다만 하토야마 총리가 최근 한국 정부의 천안함 사건 대응에 적극적 지지 입장을 밝힌 데다 지난달 말 제주도의 한 · 중 · 일 정상회의에서 "지난 100년의 과거사를 확실히 청산하기 위해 반성할 일은 반성하겠다"고 의지를 표명한 직후에 사임한 것은 아쉽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