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이데올로기는 피동을 좋아해


① 그는 옛 여자 친구의 결혼 소식에 저으기 놀란 눈치였다.

② 10년 만에 나타난 그는 영판 딴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감동시켰다.

③ 여자들은 약간 까탈스러운 것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④ 서해 바닷가의 아름다운 놀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 표준어로만 이루어진 문장은?

2009년 4월 치러진 9급 공채 시험 뒤 시험을 주관한 행정안전부가 홍역을 치렀다.

일부 문제가 오답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국어 표준어 문제였다.

행안부는 ④번을 정답으로 제시했지만 곧바로 수험생들 사이에서 "'잊혀지다'란 말은 이중 피동형인 만큼 표준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수험생들의 이의신청은 행안부에서 "'표준어 규정'과 '한글 맞춤법'은 서로 다르며,이를 구분하는 능력도 평가 대상인 만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지함으로써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가 글쓰기에서 무심코 또는 일상적으로 범하기 쉬운 피동 표현의 오류에 관해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글쓰기의 여러 기법 가운데 완곡어법이란 어떤 적절한 용어가 충격적이거나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을 때,그것을 다른 단어나 우회적 표현으로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초점 흐리기와 같다.

그 방식은 단어와 같은 어휘 수준에서부터 문장 등 통사적 수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때로는 메시지 전체의 형식 논리 구성을 통해 이뤄지기도 한다.

가령 계층 간,이익집단 간 이해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가 터질 때 '양비론'이나 '양시론' 같은 논리를 펴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글을 쓸 때 피동형 문장을 조심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도 그 때문이다.

피동 문장은 글쓴이의 의도에 따라 완곡어법의 효과를 나타내는 표현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가) "이같이 계열사 간에 상호 지급보증으로 얽혀있는 기업 구조의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나)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기를 바랄 뿐이다."

다) "이 대표의 사퇴가 이뤄질 경우 최대의 피해자는…."


예문 가),나),다)의 통사적 공통점은 모두 자동사 '이뤄지다'를 쓰고 있다는 점,주어가 '개선,수사,사퇴'로서 각각은 행동주를 함축하고 있는 동작명사라는 점,의미상 피동형으로 쓰였다는 점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통사적 과정은 주체를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고 동시에 그럼으로써 의미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즉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약화시키는(tone-down)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우선 가)는 타동법으로 바꿔 '기업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또는 '바꾸지 않는 한''타파하지 않는 한')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다.

능동형으로 쓸 때 주체도 살아나고 문장 흐름도 힘 있게 연결된다.

나)에서는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무엇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는' 것이 정상적인 어법이다.

즉 '철저히 수사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해야 의미 표현이 명확해진다.

이는 실체를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에서도 우리의 일반적인 어법은 '이 대표가 사퇴할 경우'이다.

이를 구태여 '이 대표의 사퇴가 이뤄질 경우'라고 한 것은 통사적인 변형을 통한 초점 흐리기와 유보적 표현 효과를 불러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피동구문의 수사적 효과는 주체를 명시적으로,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모호하게 흐리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행동주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 행동주가 주역으로 떠오르지 않고,나아가 사건 발생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읽혀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식적이거나 격식을 갖춘 대화를 비롯해 특히 신문의 정치 관련 기사에서 피동형 구문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한국경제신문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