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로 불렸던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은 평양고보(지금의 고등학교)를 1년 다니다 일본교육에 불만을 품고 자퇴해 5년간 낙향해 있다가 3 · 1운동을 계기로 다시 '신학문'을 배우려고 상경했다.
그는 중동학교 고등속성과(4년 과정을 1년에 이수하는 과정)를 다녔다.
책상 걸상도 없는 학교에 향학열에 불탄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교사가 가끔 모세의 출애굽기를 이야기하면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듣곤 했다고 회고했다.
또 학교에서 기하학을 배우면서 "진실로 서구 문명에 대한 경이와 감복을 경험했는데 그 순간 내가 여태껏 쌓아올렸던 동양적,한문학적인 교양과 그 낡은 사고방식이 일조에 토담처럼 무너짐을 느끼는 동시에 서구의 과학적 실증적 학풍 앞에 스스로 무릎이 굽혀짐을 실감했다"고 적었다.
3 · 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일어난 국민적 정치운동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규정한다면 3 · 1운동이 담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를 놓치는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이 국가 주도로 제도적 근대화의 물꼬를 열었다면 3 · 1 운동은 아래로부터 분출된 개인성의 근대화와 혁신,전환을 시작한 진정한 근대화였다.
물론 도시에 사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개인 차원의,그리고 일상생활의 근대화를 위해 자아관념이 만들어지고 생각과 삶의 방식에서 근대적 특성을 보이는 개혁 운동들이 빠르게 공감을 형성했던 것이다.
양주동의 회고처럼 3 · 1운동 후 조선인은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낡은 사고방식을 개혁했다.
조선 봉건시대의 백성으로부터 대한의 근대인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리는 계기가 바로 이 운동이었던 것이다.
⊙ 자유 평등 평화 등 세계적 보편성 추구
3 · 1운동이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벨기에 등 유럽지역의 식민지나 점령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모든 피지배 민족이 독립하는 '민족 자결'이 아니라 어떤 피지배민족이 '자치능력을 지닌' 문명민족으로 평가되고 나아가 그들의 독립이 세계평화와 미국에도 이롭다고 판단될 때 독립을 승인하는 형태다.
조선이 민족자결을 바란다면 '조선인은 문명국의 국민이며 조선의 독립이 세계평화와 미국의 이익에도 이롭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행동을 해야 했다.
즉,3 · 1운동은 1차대전 이후 강대국들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나온 민족자결의 원칙을 기치로 삼아 '조선인이 자치능력을 지닌 문명민족'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집단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내 조선청년독립단의 2 · 8 독립선언서와 3월1일 독립선언서에서 자유와 평등,정의와 인도(人道),민주주의,세계평화 등 보편성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개념들을 명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바로 이런 기준을 제시하고 일본의 조선병합이 동양평화를 해치며 동아시아의 분쟁을 조장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일본의 지배가 조선인에게 혜택이 된다고 봤던 서구 강대국의 일반적 시각에 대응해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실질적인 독립국이었고,5000년 역사와 문화를 가진 문명 민족이며,자결의 능력과 의지를 가졌고 자유와 평등 정의 평화를 존중하는 근대적 주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 지식 · 교육 보급 활성화
3 · 1운동 이후 자아혁신과 개조 운동이 벌어졌고 교육 보급 활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1920년 5월과 6월에는 휘문고등학교 평양숭실학교 등 전국의 학생들이 학교에 교사 충원,영어교사 교체,기숙사 설치,학교시설 개선 등을 요구하다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학교와 대치하기도 했다.
이들 학교는 주로 기독교 계열 학교였는데 3 · 1운동 이후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욕구가 급증해 학생 수와 교회신도가 5~6배나 증가했다.
또 3 · 1운동 직후 1~2년 간 조선인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요구로 외국서적을 찾고,사회문제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신간 잡지에 많은 주문이 몰리고 문학서적도 통속문학보다는 세계적 명저의 번역본을 갈구했다. 순회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단성사로 가는 수천 군중이 장관을 이뤄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13일자)
3 · 1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이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언론과 출판활동도 활발해졌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됐고,개벽(1920) 신생활(1922)과 같은 운동성을 지향한 잡지도 등장했다.
1920년대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서구의 각 시대를 풍미했던 사조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수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