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생명 윤리 위배" vs "사회·경제적 불가피"

인구폭발 산아제한… 저출산 낙태금지… 시대따라 변해
[Cover Story] 낙태를 둘러싼 성(聖)과 속(俗)의 '기나긴 전쟁'
⊙ 그리스로마와 기독교

동방박사에게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정보를 얻은 헤로데왕은 아기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다.

마태오 복음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 전승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적어도 당시 로마에서 행해지던 영아살해(infanticide) 관습을 충실히 전해준다.

지금과 같은 피임수단이 없었던 고대 로마에서 영아살해와 낙태는 인구조절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더구나 로마법상 출생 이전의 태아는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또 시민사회에 대한 충성과 기여도를 최고의 가치로 쳤던 만큼 출생한 아기도 가족의 사회적 지위에 부속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인정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로마의 도덕적 잣대로 봤을 때 영아살해와 낙태는 생명이나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였을 뿐이다.

로마보다 인본주의 전통이 강했던 그리스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변철학이 일찍 발달한 만큼 출생 이전의 태아도 생명을 지닌다는 인식은 있었지만,그것도 어디까지나 사회나 가족의 복지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됐을 뿐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사회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구과잉을 꼽고 그 해소책으로서 낙태를 정당화했다.

그들은 완전한 삶과 생존을 엄격히 구별하고,목적과 의미가 없는 단순한 생식이나 생존은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봤다.

따라서 플라톤은 낙태를 국가경영이라는 큰 선(善)을 위한 합당한 희생쯤으로 간주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구과잉 해소를 위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은 기독교의 전래였다.

기독교는 자신의 출발점인 고대 유대교의 생명존중 이념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구약 창세기>에는 야곱의 손자 오난이 죽은 형을 대신해 형수와 잠자리를 같이했지만 결국 임신을 꺼려 체외사정을 했다가 벌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위행위를 의미하는 오나니즘(onanism)의 기원이다.

여기에서 보듯 기독교는 남성의 정액은 생명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이것을 자손 번식 목적이 아닌 다른 곳에 쏟아내는 것은 생명을 버리는 죄악행위로 간주할 만큼 엄격했다.

남성 간 동성연애를 뜻하는 소도미즘(sodomism)을 금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초대 기독교가 로마사회를 향해 낙태는 곧 살인행위라고 가르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4세기에 작성된 사도규약은 "하나님에 의해 형체와 영혼을 받은 것이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불의한 죽음이며,반드시 보복이 가해질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있다.

다시 말하면 태아에게도 영혼이 있으며,세례를 받기 전에 이를 말살하는 낙태행위는 태아에게 천국의 문을 닫는 벌받을 행위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가 유아세례를 했던 것도 영아살해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설도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죽이는 것이 불법화됐다.

로마의 낙태법은 예전 그대로였지만,교회의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낙태는 곧 살인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체의 불문율로 자리잡았다.

이후 중세의 길고 긴 기독교시대를 지나는 동안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걸출한 신학자들의 손에 의해 낙태반대는 교리로 체계화됐다.

그러나 비록 영아살해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신의 자비가 미치지 않는 음지에서는 여전히 생활고와 열악한 환경에 내몰린 사람들의 낙태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19세기중반 미국 현대의술과 낙태

16세기 종교개혁은 서구사회의 낙태 반대 전통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더욱 엄격했다. 도덕재무장(MRA)과 취지가 같은 낙태반대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은 두 개의 재미있는 특징을 안고 있다.

먼저 운동의 주체가 의사들이었다는 점이다.

1859년 미국의사협회는 당시의 낙태관행을 비판하는 동시에 엄격한 낙태금지법을 만들어줄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낙태는 논쟁이 아니라 사악한 인본주의적 유물론과의 전쟁"이라는 선언도 이 당시에 나온 것이다.

이 운동을 시작한 의사들은 매우 진지했지만 훗날 페미니즘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들 의사는 남성들이 성욕을 자제해야 여성들의 낙태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적절한 피임법이 없었던 시대로서는 불가피한 주장이기도 했다.

성적 금욕이라는 도덕회복으로 낙태문제를 해소하겠다는 발상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미국에서 낙태금지법이 보편화되고 낙태금지가 미국 정신의 일부분이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 1960년대 이후의 낙태권리 논란

지난 20세기 후반을 통상 해방의 세기라고 한다. 식민지가 독립하고 새로운 사상 · 사조가 분출했으며, 안정된 사회를 기반으로 인구가 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걸출한 여성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선언은 여성해방운동의 불을 댕겼다.

"여성들은 성적으로 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낙태를 결정할 권리는 신이나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있다고 보부아르는 주장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볼 때 낙태는 빈부격차 같은 계급의 문제라고 보는 사회 · 경제적 관점을 제공했다.

일부에서는 낙태금지파가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성의 사회진출과 권리신장을 제한하려는 남성우위론자들의 지배욕구 때문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의 목소리도 나왔다.

1973년 미국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은 낙태가 자연과 신의 섭리 이전에 현실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계기가 됐다.

임신을 원치도 않았고 양육능력도 없는 미혼모의 낙태에 법과 사회가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여성의 낙태가 사회 경제적 이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고 또 그래야 맞다는 선택우선론(pro-choice)의 출발점이 됐다.

이처럼 생명의 존엄성과 사회 경제적 불가피성 가운데 무엇이 우선이냐를 놓고 성(聖)과 속(俗)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종근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