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들 ① - ‘살색’
“기술표준원장이 한국산업규격(KS)상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색명을 지정함에 있어서 특정색을 ‘살색’이라고 명명한 것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이를 개정할 것을 권고한다.”

2002년 7월 31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동안 줄곧 써오던 우리말 색 이름과 관련해 중요한 결정 하나를 내린다.

이른바 ‘크레파스 색상의 피부색 차별’ 진정사건에 대한 결정이었다.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인 근로자 등 진정인 들은 기술표준원장을 상대로 ‘살색’이란 말이 차별행위를 조장하고 있다며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

국가표준제도를 관장하는 기술표준원에서 ‘살색’을 KS로 받아들임으로써 특정한 색만을 피부색으로 여기게 오도하고 있다는 게 요지였다.

‘살색’ 색명은 우리나라가 1967년 한국산업규격,즉 KS를 제정할 때 충분한 고려 없이 일본의 공업규격을 단순 번역해 도입함으로써 우리말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한국인을 비롯해 황색인종의 피부색을 ‘살색’이라 특정함으로써 다른 피부색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오랜 세월을 무심코 입에 익은 대로 써온 것이다.

물론 그 전부터도 일부 우리말 운동가들은 이 말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해 왔으나,진정 사건을 통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된 셈이다.

기술표준원은 이에 따라 2005년 5월 관용색 이름을 대폭 손질해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발표했다.

관용색 이름이란 하늘색,개나리색 등처럼 이름만 들어도 빛깔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색명을 친숙한 동식물이나 외래어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인종차별 논란이 있던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꾸고 노란색은 병아리색,초록색은 수박색 식으로 부를 수 있도록 했다.또 잘 쓰지 않는 국방색 등은 버렸다.

40여년 만에 이뤄진 표준 색이름 개정은 모든 출판물에서부터 산업표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큰 변화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곧 일반인들의 일상적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이게 무슨 핑크색이에요? 살색이구만.”

2009년 9월 국내 굴지의 이동통신사에서 새로 내보내기 시작한 광고가 인권차별이란 구설에 또다시 휘말렸다.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할 때 생길 수 있는 소비자 불만을 그린 상황에서 출연자가 “살색…”이라 말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막상 도착한 물건이 주문하던 당시와는 다른 경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티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곧바로 사이버공간을 통해 비난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인종차별적인 단어인 ‘살색’을 광고에 쓴 것은 사려 깊지 못하다며 “국가 경제와 문화를 선도해가는 대기업으로서 배려하는 마음이 아쉽다”고 꼬집었다.

광고주 측에서도 서둘러 “‘살색’이라는 용어가 인권 차별적 소지가 있음을 최근에야 알았다”고 사과한 뒤 해당 광고 문구를 수정함으로써 이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막을 내렸다.

‘살색’이란 단어는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말이었지만 처음 KS가 도입되던 당시에는 우리말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제화·세계화로 국가간 인종간 교류가 활발한 요즘에도 이런 말이 무심코,부지불식간 우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더구나 2003년과 2005년에 걸쳐 KS 색이름 체계를 재정비하면서 공식적으로 우리말에서 추방된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란 이처럼 한번 잘못 각인되면 나중에 그것이 오류라는 것이 드러나도 근절되기 힘든 속성을 지닌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살색’이란 말을 무조건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색이름으로서의 ‘살색’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살색’이란 단어가 엄연히 올라있다.

이는 색이름으로서의 ‘살색’이 아니라 ‘살갗의 색깔’이란 일반명사로서의 의미이다.

가령 ‘햇볕에 잘 그을린 그의 살색이 검게 보인다’처럼 쓰인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