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미군 비행장 이전 등 외교문제 우왕좌왕… 뿔난 오바마

[Global Issue] 일본, 美와의 50년 ‘밀월’ 끝나나… 중국에는 ‘求愛’ 손짓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11월13일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도쿄에서 버락 오바마 태통령과 미·일정상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버락’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유키오’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두 정상이 서로 존칭이나 성(姓)을 붙이지 않고, 이름만 부를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는 점을 과시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친구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한달도 지나지 않아 두 친구 사이가 급격히 벌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기후변화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주요국 정상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면서 하토야마 총리만 쏙 빼놓았다.

하토야마 총리가 오는 18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15)’ 정상회의가 열릴 때 별도로 만날 것을 비공식 타진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한달 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갈등의 불씨는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비행장 이전과 관련, 하토야마 총리가 종전 미·일 정부 합의를 깨려는 데서 비롯됐다.

이 문제로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신뢰가 무너졌고, 50년 동맹인 미·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다.

여파는 사태진전에 따라 하토야마 총리의 정치생명은 물론 동북아시아 질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 도화선은 미군기지 이전

미·일간 갈등의 도화선은 오키나와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이다.

도시의 팽창으로 이 비행장이 주거지에 둘러 쌓이게 되자 주민 안전을 위해 10여년 전부터 이전이 추진됐다.

찬반 논란을 거쳐 2006년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나고시 연안을 매립해 이전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그러나 나고시 주민들은 미군 비행장이 들어오는 것에 반대했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선거 공약으로 ‘후텐마 비행장의 오키나와 밖 또는 국외 이전’을 내걸었다.

문제는 하토야마 총리가 이 공약에 발목을 잡혀 우왕좌왕하고 있는 점이다.

후텐마 비행장 해법에 대해선 미국과의 기존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오카다 가쓰야 외상과 연립정부 이탈 카드로 공약이행을 주장하는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당수가 대립하는 등 여권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이런 상황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미국측의 반발이 돌출되면 “미·일 합의,미·일 동맹이 중요하다”고 했다가 반발론이 제기되면 “오키나와 주민의 부담을 줄이는 게 우선이다” “연립정권 유지가 중요하다”고 하는 등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의 오락가락 행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대만 높여 현지 여론을 ‘오키나와내 이전 불가’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원래 하토야마 정권 출범 이전만 해도 오키나와현이나 일본 내에서는 민주당이 8·30 총선 공약으로 후텐마 비행장 현외 또는 외국 이전을 제시했지만 외교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실행되긴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나카이마 히로카즈 오키나와현 지사가 하토야마 정권 출범 직후 미·일간 합의한 나고시로 이전하되,활주로를 해안으로 조금 더 옮기는 방안을 제시했던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총리가 갈팡질팡하면서 오키나와현 지사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 하토야마의 ‘반미’를 의심하는 미국

미국 정부는 하토야마 총리에게 단단히 뿔이 나 있다.

특히 외교 문제에 대해 말과 태도가 표변한 점에 배신감 마저 느끼고 있다.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에 대한 연내 결론,특히 기존 합의 준수를 전제로 한 결론을 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나를 믿어 달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기자들에게 “(후텐마 비행장 이전은) 백지상태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낄 법하다.

하토야마 총리는 또 내년 7월 참의원 선거 승리를 위해 연립여당인 사민당과의 공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의) 결론을 내년으로 미루겠다” “다른 대안을 검토하도록 각료들에 지시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그때마다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커져갔다.

특히 미국 정치권에선 ‘하토야마 총리가 반미주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나왔다.

그가 총리 취임 이전부터 ‘대등한 미·일관계’를 강조하고, 중국 방문때는 “지금까지 일본이 미국에 너무 의존했었다”며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장한 전력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외교정책 브레인인 데라시마 지쓰로 일본종합연구소 이사장이 언론기고 등에서 “종전된지 60년이 넘은 독립국가에 외국 군대가 상시 주둔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주일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점도 기억하고 있다.

급기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시했다.

미국은 내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50주년을 맞아 연내에 개최하려던 양국간 동맹강화 협의를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방침을 일본 정부에 최근 통보했다.

이 협의는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에 대한 미국측의 경고로 해석된다.

지난 9일엔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이 코펜하겐에서의 미·일 정상회담 거부 방침을 분명히 했다.

주일미군 관계자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을 점령군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나가라면 철수하면 된다”고 까지 말했다.

미국에선 하토야마 총리의 속내가 “결국 자주국방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의 오카모토 유키오 외교평론가는 “하토야마 총리가 총선 전부터 ‘대등한 미·일관계’를 강조하며 미국과 거리를 둔 것이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미·일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이라며 “미·일동맹의 약화는 동북아 질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파괴력이 있다는 점을 하토야마 총리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중국과는 유대 강화

동아시아 외교 중시를 표방하고 있는 일본 하토야마 내각은 미국과의 틈이 벌어지는 사이 중국과의 유대를 바짝 강화하고 있다.

특히 집권 여당의 최고 실세이자 대표적 친중파인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이 600여명의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찾은 건 일본이 미국 대신 중국을 ‘우애 외교’의 새로운 파트너로 삼으려는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낳고 있다.

오자와 간사장은 중의원 116명과 참의원 27명 등 총 143명의 민주당 의원이 포함된 약 600명의 초대형 대표단을 이끌고 10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오자와 간사장이 자민당에 소속돼 있던 1986년부터 일본과 중국 간 민간교류 사업으로 진행해 온 ‘장성(長城)계획’에 따른 것이다.

교도통신과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100여명이 넘는 일본 의원들이 한꺼번에 중국을 찾은 건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으며 일행 인원이 너무 많아 출국 당시 도쿄 하네다 공항을 비롯한 3개 공항에서 전세기 5대가 동원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고 보도했다.

오자와 간사장은 10일 저녁 중국에 도착한 직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동아시아 정세와 경제 문제 등을 주제로 약 30분간 회담을 가졌다.

중국 일간지 환구시보는 이날 오자와 간사장에게 각국 정상급 인사가 타는 의전 차량이 제공됐으며, 후 주석이 방문단으로 참석한 일본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극진히 환대했다고 보도했다.

또 회담 자리에서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과 농약만두 파문 등 양국간의 부정적이고 민감한 사안들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후 주석은 회담에서 “중·일 관계가 일본 정권교체 후의 과도기를 잘 넘었다”며 “양국 간의 우호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양국 관계 개선에 큰 공헌을 한 오자와 간사장에게 매우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오자와 간사장은 “중국의 경제 및 사회 발전과 국제무대에서의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며 “동아시아 외교강화를 강조하는 일본 민주당과 중국 공산당의 정당 교류를 한층 더 강화해 양국 사이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화답했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