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몸 이름 바로알기 ⑨ ‘쓸개 빠진 사람’이 줏대가 없는 까닭
"나는 쓸개 없는 개그맨입니다."

지난 9월 인천시 송도파크호텔에서 열린 한 자선모임에 참석한 개그맨 이아무개 씨가 인사말을 했다.

며칠 전 급성 담낭염으로 수술받은 자신을 우리말 속담에 빗대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담낭염은 담석이나 종양 등이 원인이 돼 담낭(膽囊)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환인데,심해지면 맹장처럼 떼어내기도 한다.

한자어 '담낭'에 해당하는 우리 고유어가 '쓸개주머니'이다.

쓸개는 간에서 분비되는 쓸개즙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곳으로,음식물이 들어오면 쓸개즙을 내어 소화를 돕는 일을 한다.

국어학자인 심재기 교수는 '쓸개'를 '쓰+ㄹ+개'의 구성으로 설명한다.

'쓰다(苦)'의 어간에 관형형 어미 '-ㄹ'과 명사형 접미사 '-개'가 붙은 것으로 본다.

'쓸개'라는 말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담즙이 매우 쓰다는 데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쓸개'는 한의학에선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해소하며 자양강장에 탁월한 효능을 갖는 약재로 쓰인다.

대표적인 게 '웅담(熊膽)'인데,글자 그대로 곰의 쓸개다.

쓰디쓴 이 곰의 쓸개즙을 상품화해 덕을 톡톡히 본 곳이 대웅제약이다.

이 회사의 전신인 대한비타민에서 1961년 시판하기 시작한 간장약 '우루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무명이던 이 회사를 한때 국내 3대 제약사의 하나로 키운 것이다.

대한비타민은 1978년 아예 사명을 곰 '웅'자를 써서 대웅제약으로 바꾼 데 이어 지속적인 곰 마케팅을 펼쳐 '웅담의 회사'란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심어줬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선 쓸개가 이런 생물학적 의미보다 '줏대(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나 '정신'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남의 밑에서 빌어먹고 살긴 하지만 쓸개까지 내놓은 것은 아니다."

같은 게 그런 예이다.

'쓸개'는 또 한자어 '담(膽)'과의 경쟁에서 우월하거나 적어도 뒤지지 않는 쓰임새를 보여 관용구나 속담의 형태로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쓸개(가) 빠지다'이다.

이는 '하는 짓이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줏대가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쓸개 빠진 놈'이라고 했다면 줏대가 없거나 정신을 바로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아주 심한 욕이다.

'쓸개에 가 붙고 간에 가 붙는다(=간에 붙었다 쓸개[염통]에 붙었다 한다)'란 말도 있는데,이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 지조 없이 이편에 붙었다 저편에 붙었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간담이 서늘하다'란 말도 많이 쓰는데 이는 '몹시 놀라서 섬뜩하다'라는 뜻이다.

이때의 '간담(肝膽)'은 간과 쓸개로,예로부터 '서늘하다'와 어울려 관용구로 쓰일 때는 '속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담(膽)'은 쓸개의 한자어이지만 '담력(膽力)'이란 뜻으로 쓰일 때는 '겁이 없고 용감한 기운'을 가리킨다.

'담이 크다/담력을 기르다/담력이 세다' 같은 표현이 그런 것이다.

우리 몸 오장육부의 하나인 쓸개/담의 이 같은 비유적 쓰임새는 공통적으로 '정신,주체,용기,줏대'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쓸개'는 줏대를,'담'은 '겁 없고 용감한 것'을 나타내는 말로 갈려 쓰인다.

'쓸개 빠진 놈/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와 '대담하다/담력이 세다' 같은 표현이 그 쓰임새의 차이이다.

쓸개/담이 이런 용법을 갖는 것은 동양철학이나 한의학에서 '쓸개'를 '중정지관(中正之官)'이라 하여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중도와 바름을 지키는 장부'로 본 데서 연유한다. (조항범 충남대 국문과 교수)

그런 까닭에 우리말에서 전통적으로 '쓸개/담'은 용기,주체,줏대,정신 등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잠을 잘못 잤는지 어깨가 뻐근한 게 담이 든 거 같다."

그런데 '담이 끓다' '담이 들다' '담이 결리다'란 말을 할 때의 '담'은 한글 표기는 같지만 다른 말이다.

이때의 '담(痰)'은 두 가지 뜻을 갖는데 하나는 '가래', 다른 하나는 '담병((痰病)'이다.

한의학에서 담병은 몸의 분비액이 큰 열(熱)을 받아서 생기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대개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결리고 통증이 따른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