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공·광부 눈물닦은 ‘서민 대통령’ …가차없이 반대파 제거도

우리 근대사에서 박정희 대통령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도 드물다.

어떤 이는 권력 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독재자로 그를 떠올린다.

또 어떤 이는 서민을 위해 눈물 흘리던 진짜 영웅으로 추억한다.

과연 '인간 박정희'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 가혹한 독재자

[Cover Story] 서민에겐 따뜻 · 권력도전엔 가혹… 한국 근대화의 상징 '박정희'
그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했고 18년간 독재했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은 냉혹하게 제거했다.

정보부와 보안사, 검찰과 경찰이 독재의 손발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다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대표적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다.

1974년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배후에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관련자들을 구속 수사했다.

그해 4월 9일 대법원에서 이들 8명의 사형이 확정됐고 바로 다음날 새벽에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정권이 위기를 겪고 있을 때였다.

중앙정보부가 반국가 내란 혐의로 혁신계 인사들을 제거한 배경이었다.

1967년 동백림 사건도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예술이나 학문활동도 안보 논리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작곡가 윤이상 등 독일과 프랑스의 예술가 · 유학생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었다.

박 대통령은 정보부를 시켜 이들을 한국으로 납치했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동백림 거점 북괴 대남적화 공작단 사건'이라는 수사 결과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해외 예술인과 유학생들이 동백림(동베를린)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것.

연루된 사람만 200명에 육박했고 34명이 구속 기소됐다.

윤이상 외에도 법학박사인 강빈구, 파리 거주 화가 이응노 등 유명인사들이 포함됐다.

해외 정부와 언론은 이들의 석방과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총 9차례에 걸쳐 발동시킨 '긴급조치'는 헌법적 효력을 갖고 있었다.

'평양에 지하철이있다''컬러TV가 있다'는 식의 발언만으로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정부가 돼먹지 않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말했다가 징역10년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로는 막혔다. 민주주의는 지체됐다.

내부 권력 관리에도 철저했다.

73년 4월 그의 심복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은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박 대통령 노쇠' 등을 운운했다.

박정희는 이런 말 한 마디가 권력의 누수로 이어진다고 판단했다.

윤 사령관과 관련된 군인, 민간인 수십명이 보안사에 끌려갔고 옷을 벗어야 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4개월 후 독재반대 운동을 이끌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쿄에서 납치했다.

정권 말기로 갈수록 측근들의 호가호위는 심해졌고 유신체제는 벼랑 끝으로 몰렸다.

⊙ 서민 눈물 닦은 국부

'냉혹한 권력자'의 이면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넥타이와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가지 외에는 모두 국산으로 쓸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국산 넥타이는 매다보면 잘 풀려서 상공부에 특별히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당시 국내에 도입할 처지가 안 됐다.

전기면도기는 쓸만한 국산 제품이 없었다.

그의 죽음 직후 국군서울지구병원 의사는 낡고 구멍난 허리띠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을 보고 대통령의 시신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전속 이발사는 박 대통령의 러닝셔츠가 낡아 목 부분이 해진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먹거리에 있어서도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민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청와대에서 각료들과 회의를 마치고 나면 점심으로 우동이나 비빔밥을 즐겼다.

궁핍하게 자란 그는 가난의 슬픔을 알았다.

바지를 걷고 서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동시대인들에게 익숙했다.

농민과 여공 등 서민들과 곧잘 어울렸다.

특히 1964년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한 뒤 그해 12월 루르 탄광지역을 격려차 찾았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재독 한인단체가 발간한 '파독 광부 45년사'에 따르면 그는 준비된 원고연설을 밀치고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해도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만이라도..."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시울을 붉힌 그를 보며 광부와 간호사들도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박사는 "박 전 대통령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국민이 밥 세끼를 배불리 먹을 때까지 외국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장애인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는 장애인 복지 이야기를 꺼내면 '성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면박을 받을 때였다.

박정희는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 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을 설립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각별한 관심도 도움이 됐다.

친조카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육 여사는 1965년 한 장애인단체에 당시로선 큰 금액인 20만원을 쾌척했다.

이 돈이 정립회관 터의 계약금으로 지불됐다.

육 여사 사망 이후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지원에 나섰고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애정을 보였다.

서민들은 박 대통령의 '막걸리 행보'를 고단한 삶의 위안으로 여겼다.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여전히 박 대통령을 가슴 뭉클하게 떠올리는 이유다.

당시 언론이 박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상당부분 미화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구두 3000켤레'로 대표되는 독재자 마르코스 · 이멜다와는 분명히 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 속에서 어떤 점에 강조점을 찍을지는 후세가 판단할 일이다.

김유미 한국경제신문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