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전체주의의 상징”폐지 목소리도
공무원까지 국민의례 거부 하는건 인권의 남용 30여년 전 유신정권은 철권 통치를 정당화 효율화하는 수단으로 국민의례를 남용했다.
해질 무렵 거리에 국기 하강 음악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일제히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동작 그만'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잠자코 정권에 복종하는 게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식의 '인지부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한 장엄한 의식 중 하나였다.
민주화 이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류의 반강제적인 의식은 모두 사라졌다.
관청이나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행사가 아니라면 굳이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다.
개인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례는 재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부는 왜 국민의례를 고집하는가.
국민의례가 가지는 함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 대 '반(反)민주'로 모든 것이 설명되던 때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민(a nation)'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무심코 쓰는 단어지만 실제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또는 민족)을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한 '상상의 공동체'로 표현했다지만 일정 영역 내에 모여 있는 사람을 '국민'으로 부르는 것은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원초적인 현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국민을 '단일 행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집합체'라고 정의하자면 여기에는 '명확히 경계지워진 영토'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고구려를 비롯한 몇몇 고대 제국은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제국의 경계는 지금의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것처럼 국경(border)이 아니라 그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변경(frontier)'에 의해 설정됐다.
지배권은 제국의 중심부에 집중됐고 변방은 조공의 원천일 뿐이었다.
변방의 주민들은 지금처럼 중앙 정부가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관리하는 행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방의 수령이 조공만 꼬박꼬박 바치면 알아서 통치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 아니라는 뜻이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명확하게 정의된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면서 단일한 법률과 행정체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주권을 확립하게 된 것은 서구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절대왕정 시기(17세기)부터다.
비로소 세계는 영토의 경계가 명확한 다수의 국민 국가들로 나뉘어지게 된다.
관할구역 안에서만큼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주권)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관념도 생겨났다.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진 뒤에는 주권의 소재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왕권'에서가 아니라 국민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국가 안에서의 절대적인 권위'에서 비롯된 공권력의 행사는 반드시 주권자 국민의 동의로부터 정당성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려면 자신을 '국민'이라고 기꺼이 생각하고 정치적 의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가 '최소한' 겉으로는 모든 것이 국민의 의지라고 해야만 권력에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일수록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하는 개인들에게 특정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귀속감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는 게 필요하게 됐다.
국민의례 역시 파편화된 개인을 근대적 의미의 국민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장치 중 하나라는 얘기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도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라 해서 성조기를 향해 무한한 충성심을 다짐토록 하는 세리머니를 한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은 '한핏줄' 동질감마저 없기에 더욱 이런 의식을 필요로 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의식화 사업'이 너무 지나치면 곤란하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기강하식이나 국민교육헌장 암송을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한 것과 같은 행위는 독재 정권이 노골적으로 국민 통제 의도를 드러냈던 유치한 작품이었다.
따라서 민주와 반(反)민주, 독재와 반(反)독재의 이분법적 구도 아래서는 각종 의식을 강요하는 정권과 이에 저항하는 시민사회라는 명확한 대립각이 형성됐다.
따라서 국민의례에 대한 반대도 그 자체로서 선(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정치적 결사체로서 국민을 하나로 결속하는 일은 이제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앞서 설명했다.
여전히 세상을 민주 대 반(反)민주로만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그 밖의 정상적인 사람들을 상대로 공적 성격의 행사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할 뿐인 국민의례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펴려면 그에 합당한 논리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정도는 국가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애국심을 북돋우기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공공행사든 뭐든 국민의례를 아예 없애는 게 좋다는 이들은 국민의례가 일제의 잔재이자 전체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를 든다.
국민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이하 생략도 가능하기 때문) '국기에 대한 맹세'가 일제 강점기의 황국신민서사나 나치 독일의 국기에 대한 충성맹세문과 내용과 형식면에서 유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을 제외한 그 밖의 나라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례를 찾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원치 않는 일반인들에게 정부가 무조건 국민의례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하게 잘못이다.
예컨대 야구장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 일어서지 않았다고 처벌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좌파 시민단체가 자체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하지 않았다고 행사장에 들어와 난동을 부린 일부 우익단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들까지 공적인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하는 것을 헌법상의 기본권인양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한때 국책연구기관인 노동연구원 소속 박사급 연구원이 공식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해 물의를 빚자 노조가 이를 '양심의 자유'로 옹호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공직자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 세금에서 월급을 받아가는 이들이다.
특정 환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의사가 환자에 대한 충실 의무를 '양심의 자유'라고 거부할 수 없듯 법을 집행해야 할 공무원들이 앞장서 법령으로 규정된 행사를 거부하고 나서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공무원 노조가 대정부 투쟁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국민의례 대신 소위 '민중의례(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묵념도 민주투사를 대상으로 바꾼 일부 사회단체와 노동조합 고유의 의식)'를 치르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이들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에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래라지만 우리는 이미 광주 투사들을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서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던가.
순수하게 이들을 기리고자 했다면 국민의례로도 충분하다.
▶ 참고도서
국가학 (김명, 박영사, 1997)
현대사회학 (앤서니 기든스 저, 김미숙 김용학 송호근 역, 을유문화사, 2009)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hcha@hankyung.com
공무원까지 국민의례 거부 하는건 인권의 남용 30여년 전 유신정권은 철권 통치를 정당화 효율화하는 수단으로 국민의례를 남용했다.
해질 무렵 거리에 국기 하강 음악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일제히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동작 그만'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잠자코 정권에 복종하는 게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식의 '인지부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한 장엄한 의식 중 하나였다.
민주화 이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류의 반강제적인 의식은 모두 사라졌다.
관청이나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행사가 아니라면 굳이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다.
개인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례는 재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부는 왜 국민의례를 고집하는가.
국민의례가 가지는 함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 대 '반(反)민주'로 모든 것이 설명되던 때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민(a nation)'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무심코 쓰는 단어지만 실제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또는 민족)을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한 '상상의 공동체'로 표현했다지만 일정 영역 내에 모여 있는 사람을 '국민'으로 부르는 것은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원초적인 현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국민을 '단일 행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집합체'라고 정의하자면 여기에는 '명확히 경계지워진 영토'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고구려를 비롯한 몇몇 고대 제국은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제국의 경계는 지금의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것처럼 국경(border)이 아니라 그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변경(frontier)'에 의해 설정됐다.
지배권은 제국의 중심부에 집중됐고 변방은 조공의 원천일 뿐이었다.
변방의 주민들은 지금처럼 중앙 정부가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관리하는 행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방의 수령이 조공만 꼬박꼬박 바치면 알아서 통치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 아니라는 뜻이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명확하게 정의된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면서 단일한 법률과 행정체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주권을 확립하게 된 것은 서구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절대왕정 시기(17세기)부터다.
비로소 세계는 영토의 경계가 명확한 다수의 국민 국가들로 나뉘어지게 된다.
관할구역 안에서만큼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주권)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관념도 생겨났다.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진 뒤에는 주권의 소재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왕권'에서가 아니라 국민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국가 안에서의 절대적인 권위'에서 비롯된 공권력의 행사는 반드시 주권자 국민의 동의로부터 정당성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려면 자신을 '국민'이라고 기꺼이 생각하고 정치적 의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가 '최소한' 겉으로는 모든 것이 국민의 의지라고 해야만 권력에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일수록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하는 개인들에게 특정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귀속감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는 게 필요하게 됐다.
국민의례 역시 파편화된 개인을 근대적 의미의 국민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장치 중 하나라는 얘기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도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라 해서 성조기를 향해 무한한 충성심을 다짐토록 하는 세리머니를 한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은 '한핏줄' 동질감마저 없기에 더욱 이런 의식을 필요로 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의식화 사업'이 너무 지나치면 곤란하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기강하식이나 국민교육헌장 암송을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한 것과 같은 행위는 독재 정권이 노골적으로 국민 통제 의도를 드러냈던 유치한 작품이었다.
따라서 민주와 반(反)민주, 독재와 반(反)독재의 이분법적 구도 아래서는 각종 의식을 강요하는 정권과 이에 저항하는 시민사회라는 명확한 대립각이 형성됐다.
따라서 국민의례에 대한 반대도 그 자체로서 선(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정치적 결사체로서 국민을 하나로 결속하는 일은 이제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앞서 설명했다.
여전히 세상을 민주 대 반(反)민주로만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그 밖의 정상적인 사람들을 상대로 공적 성격의 행사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할 뿐인 국민의례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펴려면 그에 합당한 논리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정도는 국가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애국심을 북돋우기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공공행사든 뭐든 국민의례를 아예 없애는 게 좋다는 이들은 국민의례가 일제의 잔재이자 전체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를 든다.
국민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이하 생략도 가능하기 때문) '국기에 대한 맹세'가 일제 강점기의 황국신민서사나 나치 독일의 국기에 대한 충성맹세문과 내용과 형식면에서 유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을 제외한 그 밖의 나라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례를 찾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원치 않는 일반인들에게 정부가 무조건 국민의례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하게 잘못이다.
예컨대 야구장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 일어서지 않았다고 처벌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좌파 시민단체가 자체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하지 않았다고 행사장에 들어와 난동을 부린 일부 우익단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들까지 공적인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하는 것을 헌법상의 기본권인양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한때 국책연구기관인 노동연구원 소속 박사급 연구원이 공식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해 물의를 빚자 노조가 이를 '양심의 자유'로 옹호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공직자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 세금에서 월급을 받아가는 이들이다.
특정 환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의사가 환자에 대한 충실 의무를 '양심의 자유'라고 거부할 수 없듯 법을 집행해야 할 공무원들이 앞장서 법령으로 규정된 행사를 거부하고 나서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공무원 노조가 대정부 투쟁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국민의례 대신 소위 '민중의례(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묵념도 민주투사를 대상으로 바꾼 일부 사회단체와 노동조합 고유의 의식)'를 치르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이들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에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래라지만 우리는 이미 광주 투사들을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서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던가.
순수하게 이들을 기리고자 했다면 국민의례로도 충분하다.
▶ 참고도서
국가학 (김명, 박영사, 1997)
현대사회학 (앤서니 기든스 저, 김미숙 김용학 송호근 역, 을유문화사, 2009)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