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민주화 투쟁 · 對北 햇볕정책 등 업적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폐렴에 의한 합병증으로 85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외딴 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30년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겪은 납치 · 테러 · 사형선고 · 투옥(6년) · 망명(10년) · 가택연금(55차례)은 굴곡이 심했던 그의 정치 역정을 대변한다.

4수 끝에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해빙에 기여했다.

이 공로로 그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지난 50년간의 한국 정치사에서 그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욕의 세월 한복판을 지나온 '정치 거목'이었다.

⊙ 인동초의 삶 85년

[Focus] 忍冬草의 삶 85년… 대한민국 ‘정치 거목’ 역사의 뒤안길로…
1924년 1월6일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9살까지 한학자인 초암 김련 선생이 세운 초암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다.

장차 실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당시 전국 10대 명문으로 꼽혔던 목포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일제 식민통치를 겪은 그는 일찌감치 비판의식을 갖게 됐다.

상업학교 시절 작문시간에 맹자의 왕도정치와 일본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지어 내 아버지가 교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받았고 그는 맡고 있던 반장을 그만뒀다.

일본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이 아닌 해운회사(목포상선)에 취업한 그는 1945년 해방 후 종업원들의 추대로 목포상선의 대표가 됐다.

이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선전부원으로 첫 정치생활에 입문하게 된다.

그의 정치역정은 '인동초'(忍冬草)라는 그의 별명처럼 쉼 없는 고난과 좌절,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첫 고배를 마신 뒤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4,5대에 출마했지만 연달아 떨어졌다.

1961년 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됐지만 당선 3일 만에 5 · 16군사쿠테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됐고 의원직도 박탈당했다.

그가 정치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건 김영삼 후보를 제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다.

이듬해 7대 대선에서 맞대결을 펼친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패했고 이때부터 그의 수난은 더욱 심해졌다.

같은 해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고 1973년 8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요원들에게 납치돼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뒤 그는 납치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됐다.

1979년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지만 12 · 12사태 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으로 체포,사형선고를 받았다.

국내 · 외에서 정치인은 물론 문화인,일반인들이 대거 구명운동에 나선 결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결국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건 평생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후임을 선출하는 15대 대선 때였다.

1992년 대선 때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약 190만표 차이로 패한 뒤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설립,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뒤 1997년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드디어 당선에 이르렀다.

⊙ DJ의 업적

'국민의 정부'를 내건 김대중 대통령 시절,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 운영의 지침으로 삼았다.

1998년에 겪은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출범한 만큼 부도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력질주해야 했다.

그는 특유의 의지로 국면을 정면 돌파,IMF 관리체제를 조기에 극복한 뒤 '햇볕 정책'을 내건 대북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다.

결국 2000년 6월15일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해 12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및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였다.

하지만 그의 임기 말은 불행했다.

각종 게이트 의혹이 일었고 홍일 홍업 등 두 아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는 그의 업적에 큰 결함을 남겼다.

일생일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남북 정상회담도 현대상선의 '5억달러 대북송금' 파문을 불러일으키면서 흠집이 났다.

그렇다고 그의 민주주의 열망이 식은 건 아니었다.

퇴임 이후엔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던 것.

그는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초청강연과 대담 등을 통해 민주주의 철학을 설파하는 데 주력했다.

재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오직 국민과 같이 나라가 잘 되도록 가능한 정성과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그의 햇볕정책이 공격당하자 현실정치로 걸어나왔다.

2007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주문하는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 올해 들어 건강 악화

한동안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던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한 뒤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접한 뒤 "내몸의 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소회를 밝히는가 하면 6 · 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행사에서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 정권 10년이 이룬 민주주의의 신장과 평생을 바쳐 이룬 남북평화의 기조가 현 정부 들어 퇴조하는 데 대한 자괴감과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그는 지난 7월13일 폐렴증세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미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김 전 대통령은 병상에 누워서도 수없이 고비를 겪었고 결국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과 폐색전증 등을 이기기엔 그의 몸이 너무 지친 상태였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그를 찾은 수많은 정치인,문화인들은 그의 남북화해 및 경제적 성과에 대해 입을 모아 치하했다.

임종을 지킨 가족과 측근들은 그의 인생과는 달리 "편안히 가셨다"고 했다. 향년 86세였다.

민지혜 한국경제신문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