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적 욕망을 부끄러워하다

⊙ 경제성장의 그림자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28. 박완서「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0년대는 한국사회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하던 시기였다.

경제적 환경이 시간이 갈수록 나아져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고 약간이나마 생활의 여유도 느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급속한 성장이 일부 계층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경제 성장의 혜택이 사회 구성원 전체에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성장 위주의 정책은 빈부의 계층적 분화를 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시켰고,그 사이 경제적 지위가 상승한 이들은 스스로를 다른 계층과 구별짓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물질적 욕망 추구는 더욱 노골적이 되어 갔으며 정신적 가치는 무시되고 그 자리에는 다만 위선과 가식만이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라고까지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전보다 그 정도가 심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작가 박완서는 서울 출생으로 도시화,산업화를 그 중심에서 몸소 경험하면서 물질적 욕망의 블랙홀로 변해가는 서울을 일련의 작품을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바로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으로 결혼을 세 번째 한 여성이다.

그녀는 중학교를 다니던 때에 사변을 겪게 되는데 그때에 속물적 욕망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반응을 얻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려면 남들처럼 미군에게 매춘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윽박지른 일 때문에 생긴 일종의 정신적 외상이었다.

하지만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했던 그녀는 어머니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이후로 속물적 욕망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녀가 결혼을 연거푸 실패하게 된 것도 결국은 상대방에게서 지독한 속물 근성의 실체를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 위장된 욕망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어느 시골 중농과 첫 번째 혼인을 하게 된다.

그는 농사꾼 상대로 돈놀이도 하고 돈 생기는 일이라면 남의 이목을 가리지 않았으며 교만하고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지방대학의 강사였다.

그는 돈과 명예와는 상관없는 듯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고 있었지만 그 실체는 위선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세 번째 결혼은 십년 전 상처(喪妻)를 경험한 지방의 소문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두 번째 남편처럼 위선적이지는 않았지만 '한 밑천 잡아 잘살아 보자'는 배금주의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남편의 사업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뜻밖에도 동창생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십여 년 만에 돌아온 서울이었는데도 동창생들의 연락이 이어졌고 그 중 몇몇은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까지 정했던 것이다.

남편의 반응은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사업을 하는 그에게 사람을 많이 알아 놓는 것 자체가 인적 자본을 형성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편은 동창생과의 만남 그 자체가 아니라 동창생의 경제적인 쓸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데 이는 전형적인 가치전도 현상으로 비춰졌고 그녀는 과거 어머니의 모습을 세 번째 남편에게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표현대로 세 번째 남편에게서도 징그럽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동창생 모임에 나간 그녀는 고생고생해서 한밑천을 잡았다는 희숙과 오랫동안 맞벌이를 해온 영미,그리고 고위관료의 아내가 된 경희를 만나게 된다.

동창생을 만난다는 설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동창생들에게서 반가움이나 친근감이 아니라 남편에게서 느꼈던 세속적인 욕망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그녀가 세 번씩 결혼한 것에 대해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는 시선을 보내왔을 뿐더러 남편의 직업이 무엇인지에만 매달린 채 정작 인간적인 이야기는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노련한 연기자처럼 미적 효과를 계산한 껍데기뿐인 포즈를 취했을 뿐 부끄러움의 알맹이는 이미 퇴화해버렸던 것이다.

⊙ 취향과 기호를 통한 구별짓기

작품의 주인공은 고위층 남편을 둔 경희의 권유와 자기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어학원을 다니게 된다.

거기에는 일어를 배워두면 혹시라도 있을 이혼 이후의 삶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학원을 미리 다니고 있다던 동창생 경희를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일어학원에서 경희를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중급반이요, 나는 초급반인 탓도 있었고,그녀는 별로 열심스러운 학생이 못 되어서 결석이 잦았다.

간혹 만나더라도 암만해도 강사를 집으로 초빙해야 할까 보다느니,아무한테도 쟤가 아무개 부인이란 발설을 말라느니,이를테면 자기 신분에 신경을 쓰는 소리나 해서 거리감만 점점 느끼게 했다. (중략)

어느날 어디로 가는 길인 일본인 관광객이 한 떼,여자 안내원의 뒤를 따라 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중략)

마침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관광객과 아무렇게나 뒤섞였다.

그러자 이 안내원 여자는 관광객들 사이를 바느질하듯 부비며 소곤소곤 속삭였다.

"아노-미나사마,고치라 아타리카라 스리니 고주이 나사이마세(저 여러분,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중략)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학원,◆◆학관,△△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 박완서,「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되듯이 동창생 경희는 일어학원에 적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어를 공부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니었다.

경희가 학원에 다녔던 것은 주인공의 세 번째 남편의 의도와 비슷하게 인간관계를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창생 경희는 은연중에 자신이 속한 부류의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을 구별지으려는 말들을 하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언급했던 취향과 문화 속에 드러난 일종의 계급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부르디외는 취향이나 기호 속에 일종의 습속,즉 아비투스(habitus)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것이 계급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동시에 은연중에 인간의 행위나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취향이나 기호가 계급을 규정하거나 생산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가 있는데 작품 속 경희의 '일어학원 다니기'라든지,'자기 신분에 신경을 쓰는 소리'를 하는 행위는 모두 그 실제적인 사례에 속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습속이 타인을 충분히 소외시키는 권력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경희로 인해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주인공 역시 속물적인 욕망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동창생들의 대화 속에서 진심을 표하지 않았었고,일어를 배워두면 이혼 후를 대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며,또 경희의 집에 가서는 그 집 살림살이를 은근히 자기 집의 그것과 비교해보는 데에서도 충분히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전신이 마비될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위의 인용에서 보듯 그녀가 다니는 학원 근처에서 발생한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자마자 한국인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며 일본인 관광객에게 속삭이던 말이 그녀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일으켰던 것이다.

수많은 학원이 있고,그 학원들이 명문대학 입시를 준비시키지만 정작 가장 기초적인 도덕이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세태를 작가는 날카롭게 풍자한 셈이다.

오늘날 물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고 또 타인을 소외시키며,공동체의 삶을 위협할 정도라면 이는 충분히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닐까.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