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위기로 외자 ‘썰물’ … 또 IMF에 손 벌릴 처지

[Global Issue] “갚을 돈 없는데 어쩌나”…동유럽 줄줄이 ‘디폴트’에 빠지나
"동유럽의 현 상황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2001년 아르헨티나의 국가 부도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형국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월19일 '다뉴브강의 아르헨티나(Argentina on the Danube)'라는 기사를 통해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이 처한 도미노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의 충격을 이같이 표현했다.

1989년 옛 소련 붕괴 후 서유럽 선진국들의 자본 유입에 힘입어 고속 성장을 해온 동유럽 국가들은 유럽연합(EU) 가입을 계기로 서유럽을 따라잡아 유럽 통합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겠다는 '유러피안 드림(European Dream)'을 키워왔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은 동유럽 지역을 옥죄면서 디폴트의 함정으로 점점 몰아넣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디폴트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서유럽에서 많은 자금을 들여와 경제 발전을 계속해 왔으나 지난해 서유럽을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로 동유럽 각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동유럽 각국의 경제위기는 심각해지고 있다.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추가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신용경색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동유럽 각국 통화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급락하고 있다.

여기에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수출은 극도로 부진하고 경제활동은 급속히 위축돼 만기가 도래한 빚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태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은행들이 동유럽 금융사들에 대출해준 돈은 1조7000억달러에 달한다.

동유럽의 디폴트는 이 지역에 대출을 갖고 있는 서유럽 은행들의 부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EU 경제권 전체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고 연이어 세계 경제도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져 동유럽의 경제위기가 시한폭탄처럼 다가오고 있다.

동유럽 지역으로 지칭되는 주요 나라들로는 위치상으로 △유럽대륙 중부에 있는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발트해 연안의 발틱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동남부 유럽 3개국(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등 옛 소련 국가 등이 있다.

서유럽과 러시아,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이 지역은 그동안 '유럽의 변방' '유럽의 오지' 취급을 받으며 수백년 동안 외세의 침입에 시달려왔다.

13세기 중엽엔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거의 초토화됐었고,그 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독립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지만 2차 대전 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편입,공산화의 길을 걸으며 정치 및 경제시스템이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지게 됐다.

동유럽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옛 소련 해체를 전후해 민주화와 시장경제체제 도입이 활발히 진행되는 무렵이었다.

헝가리의 경우 1956년 사회주의 체제와 소련군 주둔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항거가 일어나며 동유럽의 민주화 시도를 촉발시킨 후 1990년 민주정권이 들어섰다.

체코는 1968년 소련에 대항해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 '벨벳 혁명'으로 평화적인 민주정부 수립에 성공했다.

민주화를 이룬 동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경제체제 전환을 서두르며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위한 구조개혁과 서방 세계의 선진 기술 도입에 나섰다.

하지만 옛 소련의 정치적 압박 하에 오랫동안 공산주의에 입각해 경직된 사회시스템을 유지해온 동유럽엔 경제 개혁에 필요한 자본 축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경제 개발을 하고자 나서도 그동안 쌓아놓은 돈이 없으니 투자를 할 수가 없었다.

인플레이션 문제도 심각했다.

경제개혁이 본격화된 1989년 폴란드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640%에 달했고,헝가리와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각각 35%,16%에 이르렀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경제 개발을 위해선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동유럽 국가들은 불가피하게 자본 조달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서유럽 선진국들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루마니아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15년에 걸쳐 IMF로부터 총 7번이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지난해 11월 IMF의 긴급 자금 지원을 얻은 헝가리와 라트비아도 이미 앞서 IMF의 도움을 각각 3차례씩 받은 바 있다.

또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동유럽 지배로 인연이 깊은 오스트리아는 자국 국내총생산(GDP)의 70%가 넘는 2780억달러를 동유럽 국가에 대출해줬고,독일과 이탈리아도 동유럽에서 각각 2199억달러와 2196억달러의 채권을 사들였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등도 1000억달러 이상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EU 역내 국가들에 대한 동유럽 지역의 무역 의존도도 80%에 육박했다.

이런 외자를 바탕으로 1989~1998년까지 연평균 1.1%에 불과했던 동유럽 국가들의 성장률은 2007년에 이르러선 4~6%대로 뛰어오르며 눈부신 성장을 계속했다.

아울러 2004년 5월 동유럽 지역 10개국(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과 2007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EU 가입은 변방 탈출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을 한층 높여줬다.

EU라는 한지붕 아래서 인적 물적 자본 교류가 활발해져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EU 편입은 지난해 터져나온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려 동유럽에 새로운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우선 오랜 세월 쌓여온 서유럽과 동유럽 간의 문화적 갈등이 EU라는 한 지붕 아래 살게 되면서 증폭되고 있다.

동유럽 내에서는 사용되는 언어만 11개에 달하며,종교도 가톨릭과 개신교,러시아정교와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EU 역내 국가들 사이에 인적 교류가 자유로워지면서 동유럽인들이 일자리가 많은 서유럽으로 이주해 돈을 벌었으나 최근 경기침체로 일자리가 줄어들자 이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의 낙후된 정치 및 경제시스템이 EU가 요구하는 수준을 좇아가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다.

막대한 외채와 재정적자로 EU의 유로화 도입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EU 회원국이 유로화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2년간 'ERM(유럽환율메커니즘)Ⅱ'에 가입해 물가상승률과 재정적자 공공부채 등을 평가받아야 한다.

EU에 가입한 동유럽 12개국 중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에 가입한 나라는 아직까지 슬로바키아와 슬로베니아뿐이다.

정치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표를 의식한 인기영합주의 정치를 뜻하는 포퓰리즘을 추구하는데다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밟아온 후유증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해 국민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말이다.

재정적자가 GDP의 10%에 달한 헝가리에서는 2006년 쥬르차니 페렌츠 총리가 총선 승리를 위해 국민에게 국가 재무상태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한 이른바 '거짓말 스캔들' 이후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