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인격권 보호위해 마땅”

반 “동거의무에 어긋나고 이혼·재산분할 등에도 악용”

부산지법이 흉기로 위협해 부인을 성폭행한 40대에 대해 처음으로 강간죄를 인정하면서 '부부 강간죄'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부부 강간을 인정해야 한다는 쪽에서는 "'법이 가정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전통적 관념은 시대에 뒤진 낡은 개념이며 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정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부인 성폭행은 더 이상 부부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결혼은 성관계에 대해 영원히 동의한다는 의미의 계약이기 때문에 이를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부부 강간죄가 성립되면 이혼이나 보복,재산 분할 등의 목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남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부 사이의 강간죄 성립 여부에 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행법상 강간죄 대상으로 규정돼 있는 '부녀'에 '혼인 중인 부녀'가 포함되는지, 민법상 동거의 의무로 인해 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상실되는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부부라는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한 문제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지 등을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나 1970년에 대법원이 부부간 강간죄 성립을 부정한 이후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부부 강간죄를 인정한 이번 판결은 주목할 만하다.

문제는 이혼의 빌미나 외도 등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도 없지 않은 상황에서 부부 강간죄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점이다.

부부 강간죄 논란을 분석해본다.

⊙ 찬성 측, "부인의 인격권과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돼야"

부부 강간죄를 인정해야 한다는 쪽에서는 "부인의 인격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고려하면 당연히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성관계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형법상 강간죄 대상인 '부녀'에 '혼인 중인 부녀'가 제외될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별도 법률을 만들지 않더라도 이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법상 부부 사이에는 동거의 의무,즉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지만 이로 인해 부인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거나 그런 권리가 상실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강간죄를 만들어 보호하려는 것은 '정조'가 아니라 인격권에 해당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인 만큼 이를 보호할 의무도 있다는 얘기다.

부부간 강간죄를 묻지 않는 것은 개인과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의 취지와도 맞지 않으며, 권리의식이 보편화한 문명시대에 통용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 반대 측, "동거의무에 어긋나고 이혼 재산분할 등에 악용"

이에 대해 반대하는 쪽에서는 "민법상 동거 의무에 따라 부인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해야 한다"며 부부 강간을 처벌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부부 강간죄가 성립되면 이혼이나 보복,재산 분할 등의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우려한다.

무엇보다도 남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가정을 화해시키기보다는 붕괴로 몰아갈 수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동안은 법원으로 가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었던 부부관계 문제에 대해 법원의 판결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부부 재결합이나 원만한 합의,자녀양육 문제 등을 풀어갈 수 없게 돼 결국 가정파탄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부 관계와 가정 문제는 복잡하고 특수한 만큼 법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 부부 강간죄 법제화 위한 사회적 공감대부터 형성해야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진작부터 판례나 법률을 통해 성적 결정권과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한 데 반해 우리나라는 그동안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인정에 소극적이었다.

부부 사이에 강제 추행을 인정한 사례는 있었지만 강간죄를 적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으로 상급심의 판단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번 판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부부 강간죄 성립 판결은 전향적인 판단이며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여성의 성적 결정권을 확대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부부 강간죄를 법제화하려면 먼저 사회적 공감대부터 형성할 필요가 있다.

폭력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것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과연 어디까지를 폭력으로 봐야 하느냐는 논란을 빚을 수밖에 없다.

민법상 동거 의무에 부부가 성생활을 함께 할 의무도 포함돼 있다는 점도 부부 강간죄의 법제화와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

정상적인 이혼절차를 무시하고 부부 문제에 공권력을 개입시켜 해결하려는 것이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부부간 강간죄 법제화 이전에 외국의 판례와 입법례를 검토하고 국내 판례도 축적하는 등 사회 통념과 공감대를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다.

김경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imks5@hankyung.com

<용어풀이>

부부 강간 : 법률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폭행을 수반한 강제적 성행위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부부가 상대방의 동의없이 폭력에 의해 성관계를 갖는 것이다. 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및 인격권'을 고려해 처벌하는 것이 바로 부부 강간죄다. 1월16일 부산지방법원은 필리핀 출신의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남편에 대해 특수강간죄를 적용,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심을 준비하던 피고인은 20일 자살했다.

성적 자기결정권 : 원하지 않는 성행위를 비롯 임신 출산 성기관절제 등을 강요받지 않고 개인이 스스로 모든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주요 선진국들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

☞ 한국경제신문 1월 17일자 A5면

부부간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는 16일 필리핀인 아내 V씨(25)를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혐의(특수강간)로 기소된 L씨(42 · 회사원)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이 부부간의 성관계에 대해 강간죄를 적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고국과 가족을 떠나 오로지 피고인만 믿고 온 타국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힘든 처지에 놓인 피해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야 함에도 갖은 고초를 겪게 하고 부당한 욕구를 충족하려 정당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를 무시하고 흉기로 위협한 점은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시했다.

L씨는 결혼정보회사의 소개로 2006년 8월 필리핀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2008년 7월 부인이 생리 중이라며 성관계를 거부하자 흉기로 위협,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박민제 한국경제신문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