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가격협상 이견…이권 다툼 이면엔 양국간 정치적 갈등도

[Global Issue]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러-우크라 가스분쟁에 유럽은 ‘엄동설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가스 분쟁으로 유럽이 '가스대란'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중재로 러시아가 지난 13일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천연가스 공급을 재개했지만 4시간여 만에 다시 중단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이번 가스 공급 중단에 대해 '네 탓' 공방만 계속하면서 가스 공급 중단 사태는 일주일을 넘어섰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 측은 13일 오전 10시(현지시간)를 기해 유럽으로 가는 5개 파이프라인 중 하나를 개방해 가스 공급을 재개했으나 우크라이나가 가스 수송관을 개방하지 않는 바람에 공급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측은 가즈프롬의 안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차단 이유를 밝혔다.

2006년에 이어 또다시 같은 문제로 가스 공급이 중단되자 유럽 내에선 사태의 조속 해결은 물론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줄일 수 있는 근본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유럽 국가, 엄동설한에 피해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 중단이 일주일을 넘어서면서 유럽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영하 20도 이하의 기록적인 혹한이 몰아치는 가운데 일부 국가에선 주택 난방이 끊기면서 사람들이 석탄과 나무 등 땔감을 찾아 나서고, 공장들도 연료 부족에 허덕여 잇따라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

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가스 공급 중단으로 피해를 입은 유럽 국가는 총 18개국에 이른다.

특히 이 가운데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동유럽이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가스 공급을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해 온 불가리아는 지난 6일 이후 현재까지 4만5000여가구가 난방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일부 학교는 휴교 상태다.

철강과 조선업체들도 가스 배급제 실시로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전량 수입하는 슬로바키아는 지난 6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가스 대안으로 옛소련 시절 사용하다 폐쇄한 낡은 원자력발전소를 재가동시키기로 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가스 사용이 많은 대형 공장에 생산 중단을 요청했으며, 1000여개 회사와 병원 학교에도 가스 사용 감축을 지시했다.

연간 가스 수요의 60%를 러시아에서 공급받는 헝가리에선 정부가 발전소 연료를 가스 대신 석탄이나 석유로 바꾸도록 지시했으며, 공장 가스 공급을 배급제로 전환했다.

또 부다페스트 국제공항은 난방용 천연가스를 중유로 대체했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선 지난 7일부터 약 7만가구의 난방이 끊기면서 시민 20만여명이 추위에 떨고 있다.

이 때문에 가전제품 매장은 전열기구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난방용 땔감을 장만하기 위해 사람들이 전기톱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 가스분쟁 왜 자꾸 일어나나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1930년대 구소련 가스산업의 태생지였다.

1960년대 소련의 가스산업 중심이 서시베리아로 옮겨졌지만 우크라이나는 이후에도 가스관과 가스저장 시설 등을 갖춘 가스산업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되고 국경이 갈리면서 문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가즈프롬의 핵심 자산인 가스관과 수출용 가스 저장창고 시설 등이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하게 되면서 러시아는 직접적인 통제를 할 수 없게 됐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가스를 수출하려면 우크라이나의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자체 가스전이 말라가면서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첫번째 분쟁은 1990년대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가스대금을 받으려고 시도하면서 불거졌다.

러시아가 가스대금 납부를 압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의 가스 공급을 중단하자 우크라이나는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서 천연가스를 빼서 썼다.

유럽이 가스 공급 감소에 항의하자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재개했다.

2005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수출하는 천연가스 가격을 시장가격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밝힌 이후 양측 간의 갈등은 또다시 불거졌다.

급기야 2006년 1월엔 사흘간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이 전면 차단됐다.

이번에도 가즈프롬이 가스가격을 지난해의 1000㎥당 179.5달러에서 250달러로 올리겠다고 하고, 나프토가즈는 200달러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사태가 촉발됐다.

최근 가스분쟁도 똑같은 원인이다.

러시아는 유럽으로의 수출가격(지난해 1000㎥당 420달러 수준)에 맞추기 위해 우크라이나로의 공급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천연가스 수출가격을 올리려면 러시아의 가스관 사용료도 동시에 올려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천연가스의 약 20%는 가스관 사용료로 상계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온전히 가격 협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신흥재벌)들의 가스거래 이권을 둘러싼 다툼을 비롯 △우크라이나 정계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 간의 내분 △2004년 오렌지 혁명(오렌지색을 내세운 친서방 성향 야당의 선거 승리) 이후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정치적 갈등 △에너지를 무기로 서방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의 야심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 유럽, 에너지 근본 대책 마련 목소리 높아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가스분쟁으로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최종 소비자인 유럽이다.

유럽은 천연가스 공급의 25%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중 80%가 우크라이나를 통해 들어온다.

과거 공산권이던 슬로바키아와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의 의존도가 특히 높고, 독일과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도 상당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서유럽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높아진 것은 1984년 서시베리아에서 서유럽까지 연결되는 2만㎞의 우렌고이-우즈고로드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면서부터다.

당시 프랑스 서독 등 서유럽국가들은 옛 소련에서 가스를 공급받는 대가로 현금 또는 가스관 펌프시설 등의 장비를 제공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분쟁에 매번 볼모가 되자 유럽에서도 가스 공급처 다양화 등 근본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론 그동안 유럽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 1월 가스공급 중단사태 이후 일부 EU 회원국들은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산 가스를 터키와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실어나르는 '나부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러시아의 견제 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러시아는 자체적으로 분쟁이 잦은 우크라이나나 벨로루시 등을 거치지 않고 유럽으로 직접 통하는 가스관 건설 등을 추진하며 유럽 시장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지속적으로 꾀하고 있다.

EU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신에너지 정책'에서 카스피해 연안국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천연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그 지역 천연가스 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 궁극적으로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풍력 조력 등 대체에너지 프로젝트를 대규모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번 가스분쟁이 EU의 에너지 전략 추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