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럽 등 ‘돈 풀기’에 무게…일부선 "미래 세대 어쩌라고…"

[Focus] ‘재정 지출이냐… 감세냐…’ 경기부양 해법 논쟁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천문학적인 재정을 동원한 경기부양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그동안 공화당의 경제정책 기조였던 '감세'와 오바마가 시도하는 '대규모 재정지출' 중 어느 방향이 경기 회복에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직까지는 재정 지출 쪽에 더욱 무게중심이 쏠려 있는 상황이다.

데이비드 액설로드 차기 오바마 행정부 백악관 선임고문 내정자는 지난달 28일 NBC방송에 출연해 "아직 정확한 오바마 정부의 경기부양 규모가 결정되지는 않았다"면서 "6750억~7750억달러 규모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보수적인 경제학자나 진보적인 경제학자나 우리가 대규모 경기부양을 실시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조지 W 부시 정부가 마련한 부유층 감세 혜택은 결국 없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오바마의 경기부양책 규모가 총 1조달러에 육박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도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잇따라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경기 진작을 위해 앞으로 2년간 감세,재정 지출 확대 등을 통해 총 2000억유로(약 380조원)를 투입키로 했다.

2000억유로는 EU 27개 회원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약 1.5%에 달하는 액수다.

일본 정부도 국내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지난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내놓았다.

중국 역시 중앙정부가 GDP(25조위안)의 16%에 달하는 4조위안(800조원)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한 뒤 지방정부들이 경쟁적으로 경기부양 투자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감세보다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이 경기 부양에 더 효과적이라고 권고하며 사실상 오바마식 경제정책에 힘을 실어줬다.

IMF는 30일 발표한 '재정정책 권고 보고서'에서 "세계 경기 침체가 최소한 1년9개월은 더 지속될 것"이라며 "경기부양을 위해선 세금을 깎아주는 것보다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또 "일반적으로 감세는 소비자들이 돈을 더 쓰게 하기보다 저축을 하게 만든다"며 "법인세를 낮추거나 자본 이득세를 인하하는 것은 큰 효과를 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를 쓴 올리비에 블량샤르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만일 세금을 줄인다면 정말로 돈을 융통할 길이 없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며 "세계 각국이 GDP의 3% 이상을 경기부양에 쏟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IMF는 보고서를 통해 특단의 경기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앞으로 민간 부문의 부진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며 "민간 수요를 촉진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에 매달리지 말고 다양한 대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IMF는 재정 지출을 확대하더라도 불필요한 낭비는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공공부문의 임금 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권고도 내놓았다.

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경기부양책에 대해선 "경기부양 대책의 규모가 우리가 생각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고 평가했다.

레이건 정부 시절 경제자문위원장이었고,올해 미 대선에서도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경제 자문을 맡아 적극적인 감세 정책을 주장했던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마저도 "경기 침체가 더 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부 지출을 한시적으로 늘리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펠트스타인 교수는 "과거의 경기 침체는 주로 1년을 전후해 끝났기 때문에 정부 지출의 효과가 이미 경기가 회복기로 전환될 때 나타나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이번 경기 하강은 훨씬 길게 지속될 전망이라 정부 지출이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감세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지금과 같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재정정책과 더불어 감세를 추진해야 하며, 감세의 대상은 소비를 일으킬 수 있는 저소득층과 중간층에 한정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작은 정부'를 외치며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의견은 크게 후퇴한 상태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최근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비롯,학계와 금융기관의 경제 전문가 9명에게 '오바마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사용할 5000억달러를 배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무엇인가'란 주제로 설문을 실시했다.

설문에선 5000억달러를 감세나 정부 지출 중 한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고,둘 다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전제를 걸었다.

결과는 정부 지출의 우세승이었다.

감세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단체 '성장을 위한 클럽' 소속인 앤드루 로스가 전액을 법인세 인하에 사용하겠다고 말했고 케이지 멀리건 시카고대 교수가 감세와 인프라 투자의 비중을 3 대 2로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감세는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정부 지출과 감세의 비중 중 정부 지출의 비중을 더 높게 두었다.

반면 무조건적인 재정 지출과 세수 늘리기가 능사는 아니며 감세 및 금리조정 정책 역시 중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

존 B 테일러 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는 지난달 말 '최고의 경기부양책은 영구 감세'란 제목으로 쓴 월스트리트저널(WSJ)에서 일회적인 감세나 재정 지출은 효과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영구적인 감세,다시 말해 장기적으로 낮은 세율 구조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경기를 부양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밝혔다.

공화당 일각에서도 대규모 경기부양책은 자칫 낭비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를 자제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넬 상원의원은 31일 "미국 국가부채가 이미 역사상 최대 수준인 상태에서 다시 최고 1조달러대에 달할 수 있는 재정 지출안을 고려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면밀한 관찰과 감독도 함께 요구된다"며 "이 안을 마련하기 전에 적어도 일반 국민들에게 1주일 정도의 시간을 주고 충분히 검토해봐야 하며 상원에서도 즉각적인 법안 처리보다는 상임위원회 등을 통해 더욱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경기 침체 와중에 경기부양책에 대해 이같이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조만간 정권을 넘겨받는 오바마 당선인에게 직접적으로 경기부양책 재고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