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우리말 속 취음어 엿보기③
'동림백사건'에 담긴 우리말의 역사


# 1967년 7월 어느 날,당시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유학생과 교민들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활동을 했다는 게 골자였다.

특히 연루된 인물 중엔 재독 작곡가 윤이상 씨를 비롯해 화가 이응로 씨,시인 천상병 씨 등 유명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 의해 당시 발표가 확대 과장됐던 것으로 재조명받기도 한 이 사건은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다.

# "여러분,이것이 여러분과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중략) 오늘로 여러분의 프랑스어 수업은 마지막입니다."

지금 40~50대에게는 기억에도 새로울 것이다.

예전에 교과서에 실렸던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해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어느 시골마을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나중에 극우적 민족주의의 산물이란 비판과 함께 논란이 되기도 했던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보불전쟁'이다.

동백림(東伯林)사건이나 보불전쟁(普佛戰爭)이 가리키는 곳을 지금은 동베를린,프로이센,프랑스라고 적는다.

'백림'은 베를린의 음역어이다.

사전에도 올라 있는 정식 단어다.

당연히 '동백림'은 동베를린을 취음한 말이다.

그러면 예전엔 왜 베를린을 '백림'이라 했을까.

'백림'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개화기에 비로소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외국 지명이나 인명을 한글 또는 한자로 표기할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외래어표기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 소개되는 나라이름이나 지명 등을 죄다 한자음으로 취음해 썼다.

물론 그 근거는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에서 옮겨 적던 것들을 받아들였다.

'백림'은 베를린을 중국에서 '柏林'으로 적고 '보린' 정도로 읽던 것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이런 취음어는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구미 각국 도성 중에 덕국 서울 백림이 그중 조용하다 하니…' (1899년 1월14일자·당시 실제표기는 아래아를 사용하고 '도셩,셔울' 식으로 이중모음을 쓰는 등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같은 문구가 나오는데,이때의 구미 덕국 백림 따위가 그런 것이다.

구미는 지금도 쓰이는 말로 구라파(유럽)와 미국을,덕국은 독일을,백림은 베를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이 도이칠란트를 獨逸로 쓰고 '도이쓰'라 읽은 데 비해 중국에선 이를 德意志로 적고 '더이쯔' 쯤으로 읽었다.

이를 다시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게 독일이고 덕의지이다.

특히 요즘은 거의 죽은 말이 됐지만 '덕의지'는 줄여서 '덕국(德國)'이라고도 썼다.

100여 년 전 우리말의 속살인 셈이다.

이런 우리말의 역사를 잘 모르는 요즘 세대들은 '동백림'에서 엉뚱하게 동백나무숲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남 강진에 있는 백련사 부근엔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뤄 장관을 이루는데,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곳을 동백림(冬柏林)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수업'의 모티브가 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지금도 여전히 '보불전쟁'이라 불린다.

'보불전쟁'의 불란서(佛蘭西)는 우리가 이미 살폈듯이 '프랑스'의 일본식 취음어이다. (이를 중국에선 법란서(法蘭西)로 취음했는데 우리나라도 옛날엔 이를 줄여 '법국(法國)'이라 해 함께 쓰기도 했다)

'보'는 '보로사(普魯斯)에서 따왔는데 이는 프로이센을 음역한 말이다.

현행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외국의 인명이나 지명을 실제 발음에 가깝게 한글로 적게 돼 있으므로 새삼 백림이니 보로사니 덕국이니 법국이니 하는 말을 쓸 이유는 없다.

그러나 독일이나 불란서를 비롯해 동백림사건,보불전쟁 같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말이나 학술용어로 굳은 말은 앞으로도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또 굳이 그런 방향으로 우리말을 끌고 가 스스로 우리말 체계를 흩뜨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취음어는 그 나름대로 기능을 갖고 가치가 있는,우리말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 다음호에 계속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