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 키우는 교육과 정부 지원이 비결
[Global Issue] 노벨상 자연과학 부문 휩쓴 일본…우린 뭐하지?
올해 일본은 노벨상 자연과학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첫날인 6일 노벨생리의학상은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를 발견한 독일 하이델베르크 암연구센터의 하랄트 하우센 박사와 에이즈(AIDS)를 일으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발견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바레-시누시(파스퇴르 연구소),뤽 몽타니에(세계에이즈연구예방재단) 박사 등 3명에게 돌아갔다

다음 날 7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자 일본 열도는 흥분에 빠졌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가 일본인 2명과 일본 출신 미국 국적인 1명 등 모두 일본인 출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NHK 등 일본의 각 방송은 이날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대 명예교수와 고바야시 마코토 고에너지 가속기연구기구 명예교수 등 일본인 2명과 일본 출생 미국 국적인 난부 요이치로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가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사실을 자막을 통해 속보로 내보냈다.

교도통신도 난부 명예교수가 일본 출신 미국적인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일본인 3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고 강조했다.

일본인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2002년 고시바 마사토시 도쿄대 교수가 물리학상을,다나카 고이치가 화학상을 받은 지 6년 만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물리학상을 휩쓴 것이다.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난부 교수는 아원자 물리학에서 '자발적 대칭성 깨짐'의 메커니즘을,고바야시 명예교수와 마스카와 명예교수는 자연계에서 쿼크의 존재를 예측하는 대칭성 깨짐의 기원을 발견한 공로가 인정됐다.

노벨위원회는 난부 교수의 자발적 대칭성 깨짐 이론은 "매우 유용한 것으로 판명됐으며,소립자 물리학의 표준 모델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고바야시 교수와 마스카와 교수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소립자 쿼크가 6종류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72년 '고바야시-마스카와' 이론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8일 발표된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 명단에도 일본의 시모무라 오사무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미국의 마틴 챌피와 로저 첸과 함께 포함됐다.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 산하 노벨위원회는 8일 수상자들이 녹색 형광단백질의 발견과 개발이라는 업적을 세웠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녹색 형광단백질(GFP)의 발견 덕에 신경세포가 어떻게 자라나는지 혹은 암세포가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이전에는 관찰할 수 없었던 생체 내 현상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고 노벨위원회는 설명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해양생물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시모무라 박사는 해파리의 일종인 '에쿼리아 빅토리아'로부터 GFP를 처음 추출해 냈으며,GFP가 자외선 아래에서 녹색 빛을 낸다는 점 또한 처음 발견했다.

⊙ 일본 기초과학의 저력…정부 아낌없는 지원이 원천

일본은 올해 발표된 노벨상 자연과학 부문 수상자 9명 가운데 4명을 배출하며 일본 기초과학의 저력을 알렸다.

일본은 노벨 물리학상만 5번 따냈고 수상자는 7명으로 늘었으며 화학상 5명이 됐다.

이 밖에도 문학상 2명,의학생리학상과 평화상 각 1명 등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은 모두 16명에 이른다.

1940년대부터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 전통에 정부의 아낌없는 과학 지원 정책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첫 물리학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1949년)를 비롯해 도모나가 신이치로(1965년), 고시바 마사토시(2002년)가 소립자물리학 관련 연구로 영예를 안았다.

올해 물리학ㆍ화학 수상도 그 연구 전통을 잇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일찍부터 미국이나 유럽에 맞먹는 실험 시설 등 연구 환경이 풍족했던 것은 아니다.

유럽 유학파를 중심으로 1910년대부터 이화학연구소 등에서 물리학 연구를 시작했지만 변변치 못한 장비 탓에 자연히 이론 물리학 연구가 중심이 됐다.

1960~70년대 논문이 평가된 올해 수상도 이런 '연필과 노트'로 일궈낸 물리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초창기 학자들의 열정과 집념이 좋은 성과를 내자 많은 젊은이들이 이에 매료돼 과학도를 지망하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 역시 기초과학의 전통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으로 과학 강국의 초석을 놓은 일본은 당시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과학연구 예산을 늘려갔다.

2001년에는 5년 동안의 과학기술정책 방향을 담은 제2기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 "50년 안에 노벨상 수상자 30명 정도를 배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노벨상 자연과학 수상자 숫자가 국가의 과학기술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판단해 2006년부터 시작한 제3기 계획에도 이 목표는 그대로 이어졌다.

지난해부터는 '세계 최고수준 연구거점 프로젝트'를 시작해 도쿄대,교토대,도호쿠대 등 5개 거점을 정해 5억~20억엔을 최장 15년간 투자하고 있다.

이 거점은 세계 각국의 우수한 과학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연구만이 아니라 사무 절차 모두 영어 사용이 원칙이다.

과학자는 세계 수준의 연구자가 많은 곳이나 연구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모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일본 연구기관에서 활동한 연구자가 노벨상을 탄다면 거기에 최고의 과학자가 모이게 마련이고,이런 연구자들과 경쟁하면서 갈고 닦은 일본인도 노벨상을 탈 수 있다는 발상이다.

⊙ 한국의 현실은

기초과학의 수준이 곧 국력이자 경쟁력인 시대다.

하지만 과학부문 노벨상 수상자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창의력과 거리가 먼 과학교육,입시위주의 교육,인재들의 이공계 기피 등 사회적 분위기는 기초과학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장애물이다.

우선 창의력을 죽이는 교육시스템이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개혁을 외치고 해마다 교육제도를 뜯어고치다시피 하지만 학생들이 입시에만 목을 매는 현실은 그대로다.

학교교육은 건성이고 입시를 위한 학원수강이나 과외를 통해 시험 점수를 잘 받는데 필요한 요령과 방법을 배울 뿐 창의력을 키우진 않는다.

또 이공계 기피현상도 심각하다.

2004년 기준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는 18세 이상 인구의 0.4%로 유럽연합 19개국 평균(0.6%),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0.5%)에 못 미친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

우수한 학생들은 이공계를 기피하고 당장 취업 전망이 좋은 문과 계열이나 의대로 몰린다.

지난 5년간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 98명의 47%인 46명이 국내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학비·연구비 지원에서 취업·보수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경제적으로 이공계를 푸대접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이공계 박사가 2003년 919명에서 지난해 604명으로 줄어든 것은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과학기술을 우대하는 사회적 여건,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대규모 투자,독창적 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게 과학 분야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