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

☞ 한국경제신문 10월7일자 A38면

로마 사람들은 투기꾼을 '그라시'(Graeci)라고 불렀다.

그라시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로마 시대에도 투기꾼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지 말자.

국제 원거리 무역에 따르는 환어음 결제에서부터 무역 위험을 헤지하는 다양한 보험형태의 파생상품들까지 지금 있는 것은 그 시대에도 당연히 존재했다.

드넓은 제국의 조세 징수권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투기 상품이요,농업 선물(先物)상품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당대의 투기 열풍은 물론 화폐가 이자를 낳는다는 사실부터가 못마땅했다.

그의 대표작인 '정치학'의 한 구절은 "요즘의 금융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돈으로 돈을 버는 복잡한 기술은 모리배가 할 짓이다"고 쓰고 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바로 그 말을 월가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보면서 지금 우리는 되풀이하고 있다.

헬레니즘 문명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경매장도,상품창고도 종잇조각을 발행하고 그것을 유통시켰다.

군인과 법률가의 체제였던 로마가 고난도의 금융투기를 만났을 때 그것을 그리스 사람의 사기술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금융 투기는 3세기께에는 이미 귀금속에서 독립한 신용화폐로까지 옮아갔고 통화위기는 일상적 현상이 되고 말았다.

물론 도가 지나치면서 로마는 파국을 맞았다.

르네상스와 함께 투기도 부활했다.

금융투기가 극성을 부렸고 급기야 1351년 베니치아는 루머 단속법까지 만들었다.

정부 채권의 가격을 떨어뜨리는 루머를 단속하고 채권 선물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터졌던 채권투기에는 하인들과 과부들까지 미쳐들었고, 1690년대 영국의 주식회사 붐 당시에는 심지어 '고아원 주식회사'까지 등장했으니 현대의 닷컴 열풍을 능가할 정도였다.

투기의 전형으로 불리는 튤립 광풍의 원조는 놀랍게도 중국의 당나라였다.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하고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열리자 장안의 부자들은 그들의 정원을 장식할 아름다운 모란꽃 투기에 몰입했다.

장안에서는 매년 늦은 봄 화려한 모란꽃 경연대회가 열렸고 1등을 받은 모란 가격은 집 한 채를 훌쩍 뛰어넘었다.

농부들이 곡물 아닌 모란 재배에 미쳐갔던 것은 당연했고…. (장안의 봄:이시다 미키노스케)

아마도 지금의 금융투기와 가장 비슷한 형태는 1720년에 터졌던 미시시피 버블 사건일 것이다.

화폐의 금 태환을 포기하고 대신 토지를 담보로 무한정의 화폐를 발행하는 요술은 바로 이 시대의 작품이다.

부동산을 기초자산으로 부풀려 올린 거품이라는 면에서 작금의 금융거품은 미시시피 버블과는 쌍둥이다.

미시시피 주식을 사기 위해 과부들은 과부연금을 해약했고 창녀들은 몸을 팔았다.

남미 광산 붐에서부터 미국의 철도 투기(1845년)를 거쳐 20세기 들면 자동차 라디오 비행기에까지 모든 인간의 위대한 진보에는 크건 작건 열광적인 투기가 붙었다.

투기는 또한 진보를 장려했다.

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누리는 많은 진보들 중 상당수는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투기는 악마적이고 부도덕하지만 분명 그것에 맡겨진 역할도 있다.

새삼 당황해할 이유는 없다.

전우의 시체를 넘어 진군하듯이 인간의 욕망이 부딪히는 장터에는 언제나 거친 파열음이 터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리스크 제로에 도전한다는 현대 파생상품의 금융사기적 구조와 끊임없이 거품을 만들어 내는 투기적 금융거래를 용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금융사기와 배임,횡령에 대한 광범위한 사법적 청소작업이 조만간 월가에서 시작될 것이다.

구제금융 법안도 당국의 조사와 처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거품은 걷어내고 과잉은 제자리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자본주의 종말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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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투기거품 시련을 겪으며 성숙해졌다

해설

투기는 시장 가격이 급변하는 틈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자본이득을 위해 정상적인 수익을 포기하는 것은 투기라고 볼 수 있다.

투자는 수동적이지만 투기는 능동적인 점이 차이다.

투기는 모든 인류가 자신의 유전자에 갖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도박의 마력과 비슷해 한번 몰입되면 빠져나오기 힘든 것도 이런 유적자적 속성에 기인한다.

투기는 또한 탐욕과 공포를 수반하고 있다.

세계적인 주식 투자자 조지 소로스도 자신의 놀라운 수익률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뿌리 깊은 열등 의식 때문이라고 털어놓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이 투기와 함께 성장해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서도 투기는 존재해왔다.

로마의 경우에는 현재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과 비슷한 여러 제도들이 도입돼 있었다.

시장은 번성했고 돈은 이자를 받고 자유롭게 대출되고 있었다.

신용이라는 개념이 이미 출현하였으며 선박 등 재산 안전을 위해 원시적이지만 보험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로마 시민들은 부를 향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를 향한 욕망은 결국 투기로 귀결돼 로마 말기에는 투기 광풍이 불었다고 전한다.

조세 징수업자들의 주식과 채권을 사고 팔았으며 현금이나 신용으로 각종 재화를 교환했다.

이러한 거래 수단에 해외 식민지에 있는 영지나 농장 노예 말 등까지 동원됐다고 역사는 전한다.

정규재 논설위원은 로마시대 이후 전 세계 역사에 불어닥친 각종 투기 사례를 소개하면서 인류의 진보와 함께 투기도 다양한 형태로 발달해왔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자본주의에서 투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투기로 인해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투기가 몰아닥칠 때에는 이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다시 시장의 안정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정 위원은 아울러 투기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법에 의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래야만 모럴 해저드를 없애고 시장 기능에 의한 건전한 자본주의가 다시 꽃피울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는 일부에서 떠들고 있는 투기세력으로 인한 자본주의 몰락이나 종말론은 지나친 기우이며 이런 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는 다시금 성숙해질 것이라고 재삼 강조하고 있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