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천고마비'에 담긴 숨은 뜻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도 슬그머니 물러나고 어느새 가을빛이 완연하다.

가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역시 '천고마비(天高馬肥)'일 것이다.

이 말의 풀이를 적으라는 시험에서 누군가 '하늘에 고약한 짓을 하면 손발이 마비된다'고 답했다는 썰렁한 농담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한자어 의식이 많이 약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식으로 거의 관용어처럼 굳어져 쓰이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가을이 되면 하늘이 높고 맑으며 모든 것이 풍성함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 도심에서는 그 전만 못하지만 예부터 우리 가을 하늘은 청명 그 자체로,세계에 자랑할 만한 상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천고마비'가 본래부터 가을의 풍요로움과 맑고 깨끗한 하늘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곡절이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태생은 본래 중국이고 그 원형은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이다.

중국에서는 이 말을 '가을이 깊어 가니 변방의 말(馬)이 살찐다'는 뜻으로 썼는데,이는 그 무렵이면 북방 오랑캐들이 살찌고 날랜 말을 이끌고 침략하기 쉬우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은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흉노족은 지금의 만리장성 넘어 북방에서 말을 타고 수렵 생활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유목 기마민족이었다.

이들은 넓은 초원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말에 풀을 먹여 말을 살찌웠는데,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가을이면 이 말을 타고 중국 변방으로 쳐들어와 가축과 곡식을 약탈해 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가을철이면 언제 흉노족이 침입해 올지 모르니 미리 이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추고새마비'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일본에서 받아들이면서 자기네는 섬나라인지라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겁낼 까닭이 없으니 '새(塞)'를 빼고 '추(秋)'를 '천(天)'으로 고쳐 '천고마비'라 해 가을철을 수식하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원로 언론인이자 한글학자인 정재도 선생은 <한말글연구> 7호(2002년)에서 이런 변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네 역시 역사적으로 언제나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받아왔는지라 마땅히 '추고마비'를 받아들였어야 했을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일본의 '천고마비'를 취해 쓰고 있으니 철딱서니 없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의 지적대로 '천고마비'는 누구나 알고 쓰면서도 그 원말인 '추고마비'를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어찌 됐든 '천고마비'는 단순히 청명한 가을을 상징하는 말을 넘어 외침(外侵)과 그에 대한 경계심을 깨우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말이란 게 시대에 따라 변하는 유기체 같은 것이어서 지금 와서 새삼 '천고마비'를 버리고 '추고마비'를 써야 할 이유도,절실한 필요성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천고마비'란 말의 생성 과정을 통해 그 본래 원형을 살피고,그럼으로써 그 말이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에 담긴 역사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횡설수설'도 본래의 뜻과 멀어져 정반대로 쓰인다는 점에서 '천고마비'와 유사하다.

지금은 '조리 없이 말을 이러쿵저러쿵 지껄임'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는 '가로로나 세로로나 다 꿰뚫어 알고 있음(橫說竪說)'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횡설수설'이 술 취한 사람이나 정신 나간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지만 옛날에는 '부처님도 설법할 때 횡설수설하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소동파는 중국에서,정몽주는 고려에서 횡설수설을 가장 잘했던 사람이라고 한다(김언종,《한자의 뿌리2》).

'횡설수설'은 애초에 워낙 박학다식하고 말을 잘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해 세월이 지나면서 훗날 이 말 저 말 함부로 한다는 의미로 완전히 전이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