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8월 26일 국회 본회의장.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여야 의원들 간에 난데없는 호칭 문제로 고성이 오갔다.

발단은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S의원이 제공했다.

"현 정권의 개혁 대상이 돼야 마땅할 김종필 씨가 개혁 선봉에 서야 할 국무총리가 돼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개혁을 운운할 수 있느냐."

그는 김 총리를 시종일관 '김종필 씨'라고 부르면서 공세를 폈다.

여당 석에서 곧바로 "그만해" "당장 나가"라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본회의장은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어 나온 국민회의 Y의원은 "어떻게 정부의 국무총리를 '씨'라고 호칭할 수 있느냐"며 "용어선택에 주의해 달라"고 반격했다.

우리말에서 '씨'는 본래 성이나 이름 뒤에 붙어 높임을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특별한 직함이나 직책이 없는 사람에게는 '씨'를 붙임으로써 우리말의 적격성을 갖춘다.

하지만 이 말이 권위나 존귀함의 의미까지 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씨'를 절대 쓰지 못한다.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에게 붙일 수 있는 경어인 것이다.

우리말의 호칭에는 상하 계급이 지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언어 의식상 '김종필 씨'는 여간해선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그때 S의원이 '김종필 씨' 대신 그의 영문 애칭인 'JP'를 썼다면 차라리 여당 쪽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까.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JP·DJ·YS의 진화 '2MB'
# 2008년 6월.

연일 서울시청 앞을 메우며 열리던 촛불집회는 한편으론 각종 구호들의 경연장이기도 했다.

'배후는 양초공장' '화르르 열받'소'' '6월은 범국민 쥐잡기 달' '명박산성'(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이 컨테이너를 연결해 놓은 모습을 성곽에 빗댄 말) '2MB 냉큼 물러나시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2MB'이다.

'2MB'는 '이명박'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동음이의 효과를 노린 이런 수법은 일종의 칼랑부르로 B2B,e4u 등처럼 오랜 인터넷 통신언어의 표현 양식 중 하나다.

MB는 원래 데이터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 기호로,'메가바이트(megabyte)'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컴퓨터 프로세스의 속도를 나타내는데 1970년대 메가바이트의 개념이 쓰이기 시작했으니 지금의 컴퓨터에 비하면 엄청나게 느린 속도다.

촛불 시위장의 '2MB'는 거기서 유추해 '이명박'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매우 '느려 터진',컴퓨터 용어로서의 본래 의미와 이름 '이명박'을 가리키는 함의가 중첩되면서 극적 이미지를 부각시킨 상징 기호인 것이다.

역시 컴퓨터 칩을 가리키던 '386'이 1990년대 후반 사회적인 의미가 덧입혀져 재탄생하는 순간 그 어떤 단어보다 강력한 상징어('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로서 사람들에게 각인됐던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리는 말이다.

'2MB'는 사실 지난해 대선 때 한나라당이 만든 홍보용 동영상에 나오는 것이었데,이번 촛불시위에서 반이명박 구호로 다시 등장하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영문 이니셜로 표기한 원조는 JP(김종필)이다.

JP는 1960년대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해 40년 이상을 언론에서 한결같이 애용한 말이다.

그 뒤 DJ와 YS가 합류하고,많은 정치인들이 신문에 자신의 이름도 이니셜로 적어달라고 자청할 정도로 강력한 기호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2MB'는 거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다.

이름을 영문 이니셜로 표기하는 방식은 우리 문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언어 체계 안에 뿌리를 내리기에는 여전히 많은 저항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강력한 표현 방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JP'니 'MB'니 하고 부를 수 있으니 언어의 평등화에도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