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속도 느린 수험생에게 사시 시험시간 짧아 불리"…청구인도 가지가지

[Focus] "서울말이 표준어가 된건 부당"…별라별 헌법소원 다있네
"우리 헌법소원이나 내 볼까?"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민변 등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면서 헌법소원이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헌법소원(憲法訴願)은 헌법소원심판청구의 약자.

공권력 행사나 불행사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았다고 판단한 국민이 변호사를 통해 헌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하는 제도.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1년 이내,기본권 침해 사유를 안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청구해야 한다.

재판부가 지정되면 해당 헌법소원이 적법한지 심사한다.

만약 심사결과 적법하지 않으면 각하되고 적법하다고 판단되면 심판에 회부된다.

헌법소원의 심리는 전원재판부가 한다.

전원재판부는 재판관 9명 전원으로 구성된다.

만약 국가기관이나 법무부장관 등이 해당 헌법소원과 이해관계가 있으면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다.

심리가 종료되면 종국 결정을 내려야 한다.

결정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심판청구가 부적법한 경우에 하는 각하결정,청구가 이유 없을 경우에 하는 기각(합헌)결정, 심판청구가 이유 있을 때 하는 인용결정, 심판절차 종료선언 등이다.

지난해 헌재에 접수된 헌소는 총 1770여건에 달한다.

2001년 1000건을 넘어선 이후 꾸준히 증가 추세다.

[Focus] "서울말이 표준어가 된건 부당"…별라별 헌법소원 다있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이명박 특검법, 노 전 대통령 정치발언 등 정치적 공방이 첨예한 사건에서부터 '서울말을 표준어로 쓰지 말자' 등 황당하고 기발한 헌소까지.

하루 평균 5건 꼴이다.

청구인의 범위도 다양해졌다.

한 사법시험 준비생은 자신의 글씨속도가 느리고 악필인 것이 불만이었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한 이 수험생은 2차 시험시간이 짧은 것이 불리하다며 지난해 헌소를 제기했다.

시험시간이 글씨 속도가 느린 사람의 공무담임권을 침해한다는 것이 주장의 논리였다.

입대를 앞둔 20대 청년도 특이한 헌소를 냈다.

그는 훈련소 생활 중 공중전화를 쓸 수 없는 점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공중전화 사용은 군인이 훈련소에서 수행해야 하는 기초훈련과 관계가 없는데도 이를 통제하는 것은 헌법상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역설했다.

종교인도 헌소 대열에 합세했다.

천주교인과 불교 신자 등 3명은 투표를 하러 교회에 가야 하는 일이 자신의 종교 자유를 침해한다며 올해 초 헌법소원을 냈다.

투표소가 설치된 교회에 갔을 때 목사가 교회 홍보물을 나눠주는 게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상식을 뒤집는 헌소도 접수된다.

왜 서울말이 표준어가 돼야 하냐는 헌소다.

서울말로만 교과서를 만들고 공문서를 작성토록 한 것은 지방 사는 사람들의 평등권에 반한다는 내용이다.

'전국이륜문화개선운동본부'라는 동호회 회장은 오토바이 등 이륜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운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소를 냈다.

이 청구인은 지난해 4월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해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고.

참고로 헌재는 이 같은 내용을 규정한 도로교통법 제58조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린 바 있다.

새 법률 제정을 요청하는 국민도 있다.

식물인간인 김모씨(75)의 가족은 김씨의 생명을 끊어 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했으나 병원 측은 '해당 법률이 없는 데다 우리가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이들은 존엄사 관련 법률이 없는 상항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반한다며 지난달 헌소를 제기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접수된 '피부미용사 업무범위 위헌 사건'이다.

피부관리사 업무를 규정하는 공중위생관리법 제8조 등이 피부과 의사의 시술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며 지난달 피부과 의사 몇몇이 헌소를 제기한 것.

다양한 헌소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문턱이 낮아져 생활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며 일단은 반기는 분위기다.

헌법재판소의 김복기 공보연구관은 "얼핏 황당해 보이는 헌소도 청구인의 관점에서는 문제의식이 될 수 있다"며 "예전엔 국민들이 국가를 두려워해 스스로 포기했던 사안도 이제는 '국가를 상대로 다퉈볼 만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등 시대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우려의 시각도 있다.

'무조건 내고보자'는 식의 헌소도 덩달아 늘고 있어 업무 폭주의 문제점 등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재판관 9인으로 구성된 전원재판부의 심리조차 받아보지 못한 채 재판관 3인으로 구성된 3개의 지정재판부 사전심사과정에서 각하되는 비율이 전체 각하사건의 90%에 달할 정도다.

헌법소원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호사 손을 거쳐야 한다.

이른바 '변호사 강제주의'다.

그런데도 위와 같이 어찌보면 황당할 법한 헌법소원이 제기되는 이유가 뭘까.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사회현상에 대해 헌재 본래 기능과 소송 기본요건,변호사들의 비전문성 등 헌법에 대한 이해부족이 빚어낸 결과라고 보고 있다.

전북대 송기춘 교수(헌법학)는 "일단 헌재에 대한 신뢰와 법의식 확대라는 점에서 사건증가는 긍정적"이라면서도 "그러나 애초 정치적 이슈를 법적 판단의 형식으로 해결하거나 정치권의 이해로 헌재가 세상 밖으로 알려지다 보니 기본권 문제해결을 모두 헌재에 의지하려는 왜곡된 경향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기본권 문제해결을 모두 헌재에 의지하려는 왜곡된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며 '헌재 만능주의' 확산을 탓하기도 했다.

헌법학 박사인 황도수 변호사는 "사안의 경중만 있을 뿐 국민의 기본권 보호 차원에서 보면 모두 중요한 사건들"이라며 "헌재 스스로 인력을 늘리는 등 빠른 사건처리 방법을 모색해야겠지만 헌재 재판관 1명이 헌소를 1차 심리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처리시스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한국경제신문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