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은 '피눈물'을 왜 '혈의 누'라 했나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詩語에 담긴 문법코드 ②
# 장소 - 바닷속 용궁과 숲속.

# 등장인물 - 토끼,자라,용왕,문어 장군….

이쯤 되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별주부전'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별주부전'은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근원 설화로서의 '귀토지설',판소리 사설인 '수궁가',고전소설인 '별주부전'이나 '토끼전' 따위의 이름으로 전한다.

개화기 때는 이해조에 의해 '토(兎)의 간(肝)'이란 신소설로 다시 태어난다.

이해조는 이 밖에도 '흥부전'을 개작한 '연(燕)의 각(脚)''화(花)의 혈(血)' 등 많은 신소설을 남겼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최초의 신체시라면 이에 비견되는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1906년)는 신소설의 효시다.

이인직 역시 '귀(鬼)의 성(聲)'을 비롯해 여러 신소설을 썼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 이름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의 ×' 꼴을 취한 점이다.

관형격 조사 '~의'를 써서 명사와 명사를 연결한 이런 구조를 놓고 우리말을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일본어 투의 영향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가령 '혈의 누'란 작품명은 글자 그대로 풀면 '피의 눈물'이란 뜻이다.

우리말에서 이런 말투는 사실 매우 어색하다.

이를 우리말답게 하면 그냥 '피눈물'이다.

우리말에서는 관형격 구조라도 많은 경우 굳이 조사 '~의'를 쓰지 않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가령 '선생님의 말씀'보다는 '선생님 말씀'이,'나의 고향'보다 '내 고향'이라 하는 게 훨씬 우리말답다.

이는 입말로 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면 쉽게 드러난다.

한자어로 할 때도 '혈의 누'라기보다는 '혈루'라고 하면 알아보기 쉽다.

그렇다면 이인직은 이같이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왜 굳이 '혈의 누'란 말을 썼을까.

그것을 푸는 열쇠는 국어 문장의 탄생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조사 '~의'의 남발이 일정 부분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어에서 명사와 명사의 연결에 조사 'の(우리말의 '~의'에 해당)'를 쓰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이고,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은 일본어의 강한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혈의 누'나 '귀의 성''토의 간'에서 보이는 구조가 일본어 투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의 주장도 있다.

이들은 우리말이 일본어 영향을 받기 훨씬 전에도 우리는 '~의'라는 표현을 빈번하게 썼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옛 문헌에서는 '~의'가 쓰인 아주 어색한 표현이 흔히 발견된다.

가령 <맹자 가라사대… 부모의 공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 한 불효요>(소학언해)에서 '부모의 공양' 같은 문구가 그런 것이다.

이는 통사적으로 '부모를 공양함'과 같이 '목적어+서술어' 구성으로 쓰는 게 요즘 자연스러운 우리말 투이다.

또는 줄여서 그냥 '부모 공양'이라 하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원래 우리말 투가 옛날에는 '~의' 표현을 자연스레 썼다는 얘기는 아니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번역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김미형 상명대 교수(한국어문학과)에 따르면 중세 국어 문장에서 소유격인 '~의' 표현이 많이 사용된 까닭은 한문 원전에 있는 '之'자를 그대로 번역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문 구조에는 소유격 '之'로 이뤄지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는데,이것이 그대로 직역되면서 잘 맞지 않는 소유격 구문이 형성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또 "국어 문장의 초기 실험은 한문 문장의 번역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런 문장 서술 방식이 후에 신소설에도 그대로 이어져 우리 국어 문장의 한 특성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작품 이름 '혈의 누'에 담긴 문법적 오류의 실체는,우리 글자를 가졌으되 우리 문장의 틀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문과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합작품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