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오렌지는 우리말, 어륀지는 외국말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있었던,우리말에 가장 영향을 미칠 만한 화두를 들라면 '영어 몰입교육'일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영어 공용화론과 맞물려 있어서 사실상 담론 수준의 국가적 논의 과제였다.

당장 거센 반대 여론이 들끓어 오르자 본격적인 논의가 펼쳐지기도 전에 몰입교육 주장은 서둘러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았다.

"프레스 후렌들리(Press-friendly)라고 했더니 신문에서 프레스 프렌들리라고 썼더군요." (프레스와 후렌들리의 p와 f의 발음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의미)

"처음에 미국 가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어륀지라고 했더니 알아듣더라고요." (l과 r 발음을 달리했다는 의미)

지난 1월30일 이번에는 우리 영어교육과 관련해 당시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좀 더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의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영어표기법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원어민처럼 발음하기 어렵다"며 "발음을 할 수 있는 데도 표기가 잘못돼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하니까 외국 사람들도 못 알아듣는다"고 주장했다.

평소 소신을 말한 것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본래 정치학자 출신인 그가 언어학적, 국어학적 깊은 고민과 통찰을 토대로 한 말은 아니었을 터이다.

1986년에 만들어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필 '어륀지'를 예로 들은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다.

외래어 표기법의 존재 의의는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편리함을 주기 위한 데 있다.

한마디로 '국내용'이란 뜻이다.

이에 비해 우리말을 로마자로 옮길 때 어떻게 적을지를 규정한 '로마자 표기법'은 대외용이다.

다소 거칠게 구분하자면 외래어 표기법은 한국인을 위한 것이고 로마자 표기법은 외국인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외래어를 표기할 때는 한국인이 읽고 쓰기에 편리하게 한다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통일성을 갖춰야 하고 간편해야 한다.

외래어 표기를 위해 따로 문자나 부호를 도입하지 않고 현재 쓰는 한글 24자모만으로 적기로 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이 같은 정신은 이미 1933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부터 전해오는 것이다.

라디오나 카메라,바나나,오렌지 등 실제 발음과는 다른 형태의 표기를 인정한 것도 우리에게 이미 굳은 말이기 때문에 굳이 원음을 살려 적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한글이 외국어 발음을 비슷하게나마 옮길 수는 있으나 온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school은 '스꾸우', apple은 '애뽀오',milk는 '미요끄' 식으로 발음이 될 터이지만 이를 한글로 적을 때는 표기의 편리성에 입각해 '스쿨,애플,밀크'로 한다.

base와 vase가 똑같이 '베이스'로,pan과 fan을 모두 '팬'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p와 f를 구별하기 위해 굳이 '프레스 후렌들리'라고 한들 어차피 발음을 정확히 드러내는 표기는 아니다.

우리 음운 체계에 없는 발음인 v나 f,z의 표기를 위해 순경음(ㅂ,ㅍ 밑에 ㅇ을 연서해서 표시한 소리. 훈민정음 제정 당시에는 있었으나 성종 때 사라졌다)과 반치음(△)을 부활하자는 일각의 주장도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모두 표기의 편리성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오렌지를 오륀지로 적든 어륀지로 적든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주장은 라디오를 레이디오우,모델을 마들,컴퓨터를 컴퓨러 식으로 적자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과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옳은 방향인가'라고 했을 때는 '아니다' 쪽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오렌지나 라디오는 국어에 편입된 외래어(외래어는 개념상 국어의 하나다)이고,어륀지나 레이디오우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외국말인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