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하지만 정작 잘 모르는 말들

#1. 때는 극지방의 해빙으로 인해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 지구상의 모든 천연자원이 고갈돼 가던 어느 먼 미래.

고도로 발달한 인류 문명은 인간의 감정을 지닌 로봇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2. "자식같이 기른 닭을 모두 땅에 묻는데 차마 눈뜨고 못 보겠습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살처분 대상이 돼 기르던 토종닭 4만여 마리의 매몰 작업을 지켜보던 정봉수씨(61)는 참담한 심정을 토해냈다.

두 개의 설명이 가리키는 단어는 각각 무엇일까.

모두 AI이다.

하지만 앞의 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이고,뒤 AI는 'avian influenza'의 약자다.

무엇보다도 두 개의 AI가 우리말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사뭇 다르다.

컴퓨터 용어에서 출발한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간의 지능이 가지는 학습,추리,논증 따위의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2001년 미국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돼 화제가 됐던 이 영화는 진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AI는 우리말로 '인공지능'이다.

사전에는 '인공지능'과 '에이아이(AI)'를 모두 표제어로 올리고 있다.

이는 '인공지능'이나 '에이아이'가 전문용어의 단계를 넘어 일반적인 쓰임새를 보인다는 것으로,단어의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선 초기에 '조류독감'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또 다른 AI(avian influenza)는 요즘 '조류인플루엔자'로 더 많이 쓰인다.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AI와 조류인플루엔자
특히 얼마 전 전북 지역에서 발생한 AI가 점차 전국으로 확산돼 가는 등 AI 공포감이 커지고 있다.

이 AI는 닭,오리 등 조류에서 발생하는 전염성 독감을 말한다.

이렇게 쓰이는 AI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90년대 초반께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철새가 유행성 독감을 옮긴다는 내용을 다룬 것이었다.

우리에게 낯익은 '조류독감'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97년께다.

이후 '가금 인플루엔자'란 말이 함께 쓰이다가 2004년께부터 '조류인플루엔자'란 말로 자리를 잡았다.

('가금(家禽)'이란 '닭,오리,거위 등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을 뜻한다.)

요즘은 'AI' 하면 조류인플루엔자를 떠올릴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아직 그런 AI는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물론 '조류인플루엔자'란 말도 사전에 없다.

단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용어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쓰임새로 본다면 조만간 '조류인플루엔자'가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는 것과 함께 '에이아이'란 말에 '조류인플루엔자'란 뜻풀이가 새로 추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우리가 접하는 말 가운데 낯익은 듯하면서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말로는 '구제역,우제류,광우병'이 더 있다.

'구제역'과 '광우병'은 이미 사전에 올라 있고 나머지도 언젠가 사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후보이다.

1990년대 초부터 많이 쓰이기 시작한 '구제역(口蹄疫)'은 '입 구,발굽 제,돌림병 역' 자로 이뤄진 말이다.

'소 돼지 염소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에서 주로 생기는,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병'을 말한다.

이 병에 걸리면 구강 점막이나 발굽 사이 등에 물집이 생겨 짓물러 죽게 된다는 데서 이름 붙여졌다.

구제역이란 단어의 등장과 함께 나온 말이 '우제류(偶蹄類)'다.

'짝 우,발굽 제'로,발굽이 2개로 돼 있다는 뜻이다.

소,돼지,사슴,기린,하마,낙타 따위의 짐승을 가리킨다.

광우병(狂牛病)은 1998년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에만 해도 표제어로 다뤄지지 않았으나 2007년에 나온 동아새국어사전에는 올라 있다.

주로 소에게 일어나는 뇌병으로 풀이되는데,뇌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생겨 미친 듯이 사나워지고 거동 불안 등의 증상을 보인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