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작업'의 진화
"작업계의 대표선수 민준과 지원이 만났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이들에게 평범한 작업버전이 통할리 없다.

드디어 그동안 갈고 닦은 비장의 작업 기술을 실전 테스트해 볼 상대를 만난 민준과 지원의 작업 대결은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작업의 정석'을 소개하는 인터넷 글이다.

만약 이 글을 북한 사람들이 보았다면 아마도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작업의 정석'이라니?

또 '작업계'는 뭐고 '작업버전'은 뭘 말하는 걸까.

도대체 무슨 작업이기에….

하지만 요즘 남한에서는 아주 잘 통하는 말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이 말이 단순히 일시적인 유행어 차원을 넘어 보편적인 단어로 쓰일 정도로 이미 뿌리를 깊이 내린 것 같다.

'작업'의 본래 사전적 풀이는 단순하다.

'작업 시간,작업 능률이 떨어지다'에서처럼 '(어떤)일을 함'을 말한다.

또는 '교량 복구 작업, 전산화 작업'처럼 '일정한 목적과 계획 아래 하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정신적,육체적 노동의 뜻이 담긴 '일'의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요즘 남녀 간의 관계에 쓰이면 사뭇 뜻이 달라진다.

'작업을 걸다,작업하다,작업 중이다.

' 이렇게 말할 때의 '작업'은 '남자가 여자를,또는 여자가 남자를 꾀는 일'을 가리킨다.

물론 품위 있는 말은 아니고 편한 사이에 쓸 수 있는 다소 애교스러운 표현이다.

아직 사전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2003년 국립국어원의 '신어자료집'에 수록됐으니 생명력에 따라 언젠가는 새로운 단어 풀이로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톡톡 튀는 '작업'의 위력에 밀려 다소 낡은 듯한 어감으로 느껴지는 말이 있다.

바로 '수작'이다.

'수작을 걸다'는 관용어로 쓰이는 말인데,'먼저 수작을 해 상대편이 말을 하게 하다'란 뜻이다.

박경리의 <토지>에는 '젊은 주모가 초장부터 헤프게 수작을 걸어온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니 남녀 사이에 누군가 상대방에게 수작을 거는 것은 곧 '작업하는' 것이다.

'수작(酬酌)'은 한자에서도 드러나듯이 본래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갚을 수(酬),따를 작(酌)으로,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뜻이 확대돼 '서로 말을 주고받음,또는 그 말' '남의 말이나 행동,계획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뜻하게 됐다.

'수작하다'를 기본형으로 해서 '수작을 떨다,수작을 부리다,수작을 붙이다,수작을 걸다' 식으로 쓰인다.

옛날에는 단순히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게 '수작'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말을 나누게 돼 결국 남녀 간의 '꾐'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됐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도 '작업'에 밀려 그 위치를 내놓게 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작업'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작'을 나타내는 관용어로는 '권커니 잣거니'가 있다.

또는 '권커니 잡거니'라고도 한다.

'술을 남에게 권하면서 자기도 받아 마시며 계속하여 먹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적을 때 '권커니 작거니,권커니 자커니,권커니 잣커니'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도 하는데,앞의 두 표기만 허용된다(표준국어대사전).

'권커니'는 물론 '권하다'에서 온 것일 테고 '잣거니'는 '작(酌)'에서 온 말로 볼 수 있다.

'酌'은 '잔질하다',즉 '술을 잔에 따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권커니 따르거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따르거니'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작(하)거니'이다.

그렇다면 본래는 '권커니 작거니'였을 터인데 이 말의 발음이 지금은 '잣거니'로 바뀐 것으로 풀이된다.

'잡거니'는 '잔을 잡아 권하고 받아 마시고' 하는 모양에서 '권커니 잡거니'가 표제어로 오른 것으로 보인다.

말은 사람에 따라 익숙한 표기가 달리 나타날 수 있지만 표준어는 그 중 현재 지배적으로 쓰이는 것을 취한 것이다.

따라서 까닭 없이 여러 표기가 혼재돼 쓰일 때는 사전을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