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 술집의 위기

3주 전에 미국의 5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개입과 보증으로 같은 투자은행인 JP모건체이스에 헐값에 매각되었다.

바로 다음날 베어스턴스의 직원들은 회사로부터 봉급이 삭감되거나 해고되는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러나 고액 연봉을 자랑하던 행원(banker)들은 소득의 실질적인 감소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들의 수입에는 공식적인 연봉보다는 성과급과 성공수당 같은 보너스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위기와 고민을 전하는 기사들이 재밌다.

여름별장을 헐값에 매각한다거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맺은 계약을 도중에 파기하거나, 주말용으로 구입한 두 번째 차(second car)의 잔여 할부금을 중단해야 할 처지가 이들이 처한 위기의 내용이라고 한다.

월가 주변의 고급 술집들은 이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뉴욕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인 마르티그네트는 자리 예약을 위해서 무조건 한 병에 30만~50만원 하는 술을 최소 3~4병 이상 소비해야만 한다.

이 가게의 술 매상이 25% 정도 하락했단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나이트클럽은 축하파티를 위해 이용됩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인이 대다수인 우리 가게의 고객들은 요사이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요.

그들에게 무슨 축하할 일이 있겠습니까?"

톰 마르티그네트 마르티그네트 사장의 진단이다.

(Kristina Cooke and Chelsea Emery 'Reuters')

베어스턴스의 파산을 막은 연방정부의 이번 활약은 최악의 위기 상황을 피하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베어스턴스 같이 부유한 은행들이 파산하지 않도록 돕는 일은 이들보다 훨씬 가난한 대다수 국민의 세금을 이용해 고액 연봉자들의 음주습관이나 인테리어 기호,주말활동의 가파른 위축을 억제해주는 셈이기도 하다.

베어스턴스가 파산하게 놔두었다면 이들의 고민은 인테리어나 두 번째 차,여름별장,고급 술집에서의 파티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면 수입이 막힐 뿐 아니라 신용도 잃게 되어 하나 남은 아파트나 자동차를 팔아서라도 개인적인 부채를 해결해야만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런 혹독한 시련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이들 자신의 잘못된 투자와 선택에 있다는 사실이다.

모험적인 선택을 통해 남보다 큰 혜택을 누려왔었고 선택권이 많았던 이들에게 변명의 여지는 거의 없다.

⊙ 베어스턴스 공방

"거대 은행이건 소액채무자건 그들의 부주의한 의사결정을 무마시켜주는 의무까지 연방정부에 있는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매케인의 평가다.

그는 이번 신용경색 사태의 근본 원인이 위험에 둔감해진 은행가들뿐만 아니라 집값은 오르기만 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능력도 안되면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미국의 서민들에게도 있다고 판단한다.

연방정부가 세금을 동원해서 이들을 구제해주는 건 부주의한 사람들의 손실을 사려 깊은 국민에게 떠안기는 부조리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매케인 후보의 고지식함을 곧바로 공격했다.

그녀는 매케인을 1929년 미국 대공황 당시 무기력한 대통령이라고 기억되고 있는 후버에게 빗대었다.

힐러리뿐 아니라 그의 경쟁자인 오바마도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방정부가 수백억달러의 구제기금을 조성해서 주택융자를 얻은 서민들의 파산을 해결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민주당 후보는 연방정부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리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응당 짊어져야 할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정부가 나서 해결해 주는 건 윤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베어스턴스 같이 파급력이 큰 부자가 쓰러지도록 놔두게 되면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뿐 아니라 이를 위기의 신호로 읽은 경제주체들의 판단이 이어져 경기가 급격하게 위축될 수도 있다.

이는 연쇄적인 도산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집과 자동차를 처분해야만 하는 국민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들을 향해 '당신들이 스스로 내린 잘못된 판단의 결과니 담대하게 견디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말이 90%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경제정책의 진실

"낮은 이자율이 이제 막 주택을 소유한 젊은 부부들을 위해 도움이 된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재임시절 한 말이다.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48) 불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경제학적으로도 이 말은 맞다.

문제는 늙은 부부에게는 나쁘다는 말이 괄호 속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은행으로부터 주택융자를 얻어 집을 구입한 젊은 부부에게 낮은 이자율은 곧 적은 비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각종 연금프로그램이나 장기적금을 소유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낮은 이자율이란 재산의 축소를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경제정책은 누군가에게는 좋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다.

모두에게 좋은 경제정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가들이 경제현상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무지해서가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부조리한 부의 이동을 야기하는 대표적인 경제현상이다.

화폐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은행에 예금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저축과 대출을 위축시킨다.

결국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가하면 불확실성을 만회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화량의 증가는 단기적으로 활력을 잃은 경제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통화량을 늘려 경기를 진작하는 효과는 매우 직접적으로 발생한다.

단기적으로 기업의 투자가 늘고 실업이 줄고 경기가 활기를 얻는다.

그러나 통화량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물가의 상승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또한 통화량 증가의 단기적인 달콤함에 비해 인플레이션 효과는 장기적으로 지속된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을 일종의 사회병리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장기적인 투자마인드나 안목을 훼손할 뿐 아니라 사회적 협력을 파괴하고 갈등과 적대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 문제는 민주주의다

잘못된 투자손실에 대한 정부 개입이나 경기부양 정책은 윤리적으로 옹호하기 어렵다.

결국 사려 깊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판단하는 국민으로부터 부주의하고 단기적으로 판단하는 국민에게로 부를 이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기의 확산을 막는다는 정부개입이나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은 경기부양 정책들은 빈번히 사용된다.

문제는 민주주의다.

선출직 공무원들은 선거를 의식할 수밖에 없고 선거는 10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정치인들은 3~4년 내에 몇 가지 경제 지표를 개선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는다.

대표적인 지표는 실업률이다.

인위적으로 고용을 늘리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된다.

인플레이션의 영향은 매우 광범위하다.

국민경제 전체에 파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가볍다.

반면 고용의 확대는 그 대상자들에게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인플레이션이라는 광범위하지만 작은 부담이 반대표로 연결되는 비율은 미미한 반면 고용의 확대라는 직접적인 혜택에서 기인하는 찬성표는 많다는 확신이 있는 한 선출직 공무원들은 고용을 확대하기 위해 물가 안정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 민주주의로부터의 독립

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치인들이 단기적인 목표를 위해서 장기적인 목표를 희생시키며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무시하고자 하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건 경험적으로도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의제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의 고삐를 틀어쥘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특히 경제학자들은 경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통제하는 방법을 간구해오고 있다.

1913년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준비제도의 창설자들은 대중정치가 정부로 하여금 인플레이션 정책을 취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으며,따라서 통화 제도를 연방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사회는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을 받아 임명하지만 이사들은 법에 의하여 14년의 임기가 보장되어 있다.

한번 임명되면 선거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 어느 정도 의회나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연방정부의 다른 기능을 전부 합한 것만큼이나 국민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통화관리 기능이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국민주권의 정신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선거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에게 돈과 인플레이션이 가득 담긴 광의 열쇠를 맡겨놓는 건 잘한 일이다.

이 열쇠마저 국민 다수와 그들의 대리자인 정치인들에게 맡겨놓으면 하루 잔치를 위해 곳간을 활짝 열어 놓자는 민주적 합의에 도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려깊고 장기적이며 책임을 감내하는 사람들은 충동적이며 단기적이고 남을 비난하는 이들에 비해 언제나 소수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인류의 숙명적인 윤리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간혹 윤리적 취약함이 빚어낸 선택을 다수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불황에 대처하는 자세야말로 그 사회의 가장 명쾌한 윤리적인 척도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