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둥의 진실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45) 민주주의는 얌체 국민이 필요하다
대학생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상하이의 중심지 푸둥구는 구청 건물만 여의도의 63빌딩 만하다.

먼저 푸둥의 발전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다.

원래 어촌이었던 섬에 상하이의 발전을 상징하는 동방명주탑이 올라가는 그야말로 수직상승의 20년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외국의 대학생들에게 공무원은 푸둥의 거침없는 미래상을 늘어놓았다.

질문시간에 필자는 아까 그 어촌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활기 넘친 어조는 사라지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 공무원은 아주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우리가 상하이를 개발하면서 가장 많이 연구한 사례는 서울의 강남이다.

특히 강남의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는 아주 치밀하게 연구했고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푸둥섬의 원래 주민들은 일가친척들이라 내륙지역에 땅을 마련해 같은 지역에 이주시켜 주었다는 대답을 덧붙인 다음 공무원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숙소로 돌아와 대학생들에게 필자와 공무원이 주고받은 짧은 대화의 의미를 이해했느냐고 물었지만 옳게 대답한 학생은 없었다.

2005년 봄의 일이다.

⊙ 중국 최고의 쇠고집

빌딩이나 대형 쇼핑몰을 지으려면 여러 소유주로부터 땅을 구입해야 한다.

이때 금전적인 보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협상을 지연하면 개발업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다.

이를 '알박기'라고 한다.

중국에선 한 주민이 무려 3년 동안 알박기로 버틴 적이 있다.

집 둘레에 큰 구덩이가 파이고, 물과 전기가 모두 끊긴 상태에서도 이주를 거부했다.

법원이 강제철거 명령까지 내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개발업자들은 공사를 진행할 수 없어 파산할 지경이 됐다가 극적으로 협상에 이를 수 있었다.

도심에 비슷한 크기의 아파트를 사주는 조건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우와 양으로 언론에 소개된 이들 부부는 법원의 퇴거 명령이 내려지고 주변의 집이 모두 헐려 드나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에도 농성을 풀지 않았다.

집안에 남은 남편에게 밖에 있는 아내가 로프를 이용해 음식을 전달하면서 버텼다.

그 사이 아내는 밖에서 외신들을 만나 사정을 전했다.

이들이 이토록 버티고 끝내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던 데는 중국 국민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중국의 포털 웹사이트인 시나닷컴의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85%의 국민이 이들 부부를 지지한다고 집계되었다.

국민은 이들 부부를 '중국 최고의 쇠고집'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응원했다.

우 부부의 일이 있기 전에도 알박기는 중국의 거의 모든 공사장에서 나타났었지만 대부분 주민들의 양보로 끝 맺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 부부의 일은 중국의 변화를 예측하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2007년 봄의 일이다.

⊙ 알박기와 무임승차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45) 민주주의는 얌체 국민이 필요하다
알박기는 일종의 무임승차다.

자신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공동체의 이익에 편승하려는 선택을 폭넓게 무임승차라고 일컫는다.

무임승차는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공동체 전체에는 해를 끼치는 사회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개인 대 정부, 개인 대 기업, 개인 대 집단 간의 갈등으로 표면화되지만 무임승차는 개인 대 개인의 갈등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이 기본이다.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버스에 공짜로 올라탄 무임승차자는 겉으로는 버스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당한 요금을 지불하고 승차한 다른 승객이 누려야 할 권리를 훼손하거나(자리 부족 등) 합법적인 승객들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형태로 결국 다른 개인에게 비용을 이전한다.

무임승차자를 제재하려는 정부나 기관, 기업은 이해 상대편에 서 있는 개인들의 대리자나 그림자라고 가정해야 구도가 명확해진다.

알박기는 무력한 개인 대 부유한 기업이나 국가기관 간의 갈등으로 미화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알박기의 이해당사자는 알박기를 하지 않고 미리 이주한 이웃들이다.

전체 공사비나 투자수익의 규모에 비하면 알박기 전략을 구사하는 개인의 요구를 수락하는 데 드는 금전적 보상이 크다고 만은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협상은 어렵다.

이 사실이 표면에 감추어진 알박기의 기본구조를 말해준다.

알박기를 한 사람에게 더 큰 보상을 주면 미리 이주한 사람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한번은 예외적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모두 알박기 전략을 구사하게 되면 투자나 개발은 물 건너가고 만다.

무력한 개인의 요구를 매몰차게 거부하는 거대한 정부나 기업이 인색해 보이지만 정부나 기업은 이해 상대편의 그림자일 뿐이다.

진짜 이해 상대편인 다른 개인들이 알박기 전략에 대한 포상을 용인하거나 매번 망각해 버린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에서만 무난한 협상은 정당화된다.

알박기가 매번 성공하는 사회에서는 대규모 개발은 불가능하고 이는 모두에게 정체를 의미할 뿐이다.

⊙ 중국의 두려움

알박기는 일반적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다.

무임승차를 제재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오랫동안 각인돼온 결과다.

그러나 우와 양 부부가 그토록 열렬한 지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그간 공익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이익이 무참히 짓밟혀 온 데 대한 중국인들의 울분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이들 부부의 성공적인 싸움을 전후해 중국 전역에서 강제철거에 맞서는 반대 시위가 거세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6월 중국 저장성(浙江省) 상저우시에서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주민 수만 명의 항의시위가 있었고 무장경찰이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경찰차량 4대가 공격받았다고 한다.

톈진(天津)에서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주민과 관리들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57세 주민이 경찰 6명에게 구타당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벌어져도 관영 매체는 보도하지 않지만 네티즌들은 인터넷에 관련 사진과 글을 올려 소식을 전달한다.

지난 몇 십년 동안 중국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는 많은 눈물이 있었다.

철도 도로 항만이나 도시를 새로 건설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 적은 거의 없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애초에 개인의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공산당의 논리다.

개인의 소유가 없으니 침해받은 권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개발 초기에 국민들이 무척 순진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는지조차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표출할 수단이 없었다는 해석이 더 사실에 가깝다.

평생 어민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내륙으로 옮겨놓고 공사를 시작했다는 걸 대책이라고 설명할 정도로 협상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잡음이 없었거나 없었던 체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중국의 엘리트들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시절이었다.

앞으로도 중국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앞으로도 중국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개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중국의 성장세가 꺾이리라는 부정적인 전망의 중심에는 제2, 제3의 우와 양 부부의 쇠고집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공익이라는 명분이 압도하는 분위기를 향유해 왔다.

그러나 중국의 국민들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개인의 권리가 자신의 몫을 차지하게 되면 대규모 건설은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기간설비에 대한 비용이 증가하고 투자수익률이 낮아지면 결국 투자가 둔화된다.

투자의 둔화는 성장세를 꺾고 실업은 증가한다.

실업의 증가는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급기야는 정치적 권리의 요구와 맞물려 정권을 위협할지도 모른다.

⊙ 중국의 미래,한국의 과거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중국 엘리트들은 한국의 현대사를 연구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의 현대사는 중국의 내일을 진단하는 최고의 교과서였다.

특히 한국의 부동산 열풍은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례였으리라.

개발은 필연적으로 지대를 상승시킨다.

그리고 지대의 상승은 토지 투자에 대한 높은 수익률을 수반한다.

지대의 상승은 개발비용을 높여 성장세를 둔화시킬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투자소득, 즉 '불로소득'은 사회적 단결을 결정적으로 훼손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지대의 상승과 불로소득 모두를 인정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역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투입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공익이라는 명분으로 개인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차단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계가 있다는 걸 최근의 사례들이 웅변한다.

중국과 한국사회에는 GDP나 성장률 같은 숫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알박기를 바라보는 각 국민들 시선의 간격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조만간 중국에서도 알박기를 비난하는 여론이 더 우세해질까?

중국의 미래를 예측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