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치동을 믿는 엄마와 반대하는 정부가 공유하는 인과론

며칠 전 국책연구기관인 국토연구원은 재미난 통계를 발표했다.

2004년 6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아파트 값이 가장 많이 오른 지역의 학원 수는 크게 늘었지만 서울대 합격률은 오히려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 값과 중고생 100명당 학원 수, 고3 학생 100명당 서울대 합격자 수 등을 분석한 것이다.

서울의 강남구, 서초구 등은 아파트 값이 20~30% 오르고 학원 수도 12~31%까지 증가했지만 서울대 합격생 수는 서초구가 15%, 강남구가 1% 각각 감소했다.

보고서는 "부동산 상승기에 아파트 가격 상승은 교육 이외의 변수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집값은 오르는데 서울대 합격률은 떨어진다?" 조선일보 2008년 1월13일)

사실 이 통계는 학원 밀집과 아파트 가격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따라서 보고서의 결론처럼 통계가 아파트 가격이 교육 이외의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암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서울대 합격률과 상관없이 좋은 학원이 모인 곳으로 가야 한다는 부모들의 열정이 학원 밀집과 아파트 가격 간 상관관계를 설명해 준다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통계는 서울대 합격률과 무관하게 늘어나고 있는 학원의 밀집도를 설명하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은 학원이 학업성취도를(서울대 합격률이 학업성취도를 대표하는 지수라고 본다면) 증대하리라는 전제가 얼마나 뿌리 깊게 스며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소위 대치동으로 향하는 부모나 대치동을 탓하는 정부, 그리고 부러워하거나 걱정하거나 심지어는 혐오하는 눈길로 쳐다보는 이들 모두 학원이 좋은 성적의 원인이라는 전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굴뚝같이 의지하고 있다.

보고서의 엉뚱한 결론도 이런 이상한 전제 위에 쓰였다.

⊙ 학원을 옮기는 엄마의 블랙박스

중간고사 전 수학학원에 등록했는데 시험성적이 오히려 떨어졌다.엄마는 어떤 판단을 내리실까?

그쯤에서 포기하는 엄마도 없지 않지만 대개 학원을 옮긴다.

이때 엄마는 학원을 원인, 성적을 결과로 보았다.

초등학교에서는 함수(函數)를 위와 아래가 터진 네모난 상자로 가르친다.

위에 1, 2, 3을 넣었는데 아래 2, 4, 6이 나오면 상자 속에는 ×2가 들어있다고 추정한다.

중학생이 되면 상자를 일일이 그리지 않고(중학생이나 되었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좀 그러니까) f(x)로 표현한다.

f( )가 바로 속이 보이지 않는 상자이고, x가 위에 집어넣는 수.앞 상자의 경우는 f(x)=2x.

그러나 이 글을 읽는 학생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 배운 그 상자가 함수였다는 걸 처음 깨닫기도 할 텐데 자기만 그런 것도 아니니 자괴감을 갖지는 말자.

조금 지나친 감이 있지만 학원을 옮기는 엄마들은 자녀를 함수상자로 바라본다.

위에 좋은 학원을 넣으면 아래서 좋은 성적이 나온다.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좋은 수업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생각에는 한 가지 중대한 함정이 있다.

함수상자는 블랙박스다.

상자 안은 인풋(in-put, 위에 넣어주는 수)과 아웃풋(out-put, 아래서 나오는 수)의 관계를 통해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 엄마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블랙박스 내부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학원과 무관하게 친구와의 관계로 고민이 많아 성적이 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 너무 간식을 많이 먹어서 그 시간만 되면 번번이 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풋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인풋이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 미·적분을 하는 강아지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39) 어쩌면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한다
돌고래는 재주를 좋아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물 위로 뛰어올라 그 무거운 몸을 가뿐히 돌린다.

재주를 끝낸 돌고래에게 조련사는 무언가를 던져준다.

정어리 비슷한 간식이다.

평소 어떤 과정을 통해 훈련이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말 못하는 짐승을 조련할 때 학자들이 '강화(强化,stimuli)'라고 부르는 방식이 주로 활용된다.

고개를 한 바퀴 돌면 정어리 한 마리, 두 바퀴는 정어리 두 마리.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그 칭찬도 동물에 따라서는 강력한 도구로 쓰이는 모양이다.

돌고래의 공중돌기는 정어리와 연관되고 반복을 통해 강화한다.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는 종소리와 식사를 연관했고 종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게 할 수 있다.

한 때 선천적인 능력을 무시하고 학습 능력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학자들은 강아지와 돌고래, 그리고 아이들을 일직선상에 놓았다.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기를 주고 내가 직접 하나하나 꾸민 세계에서 그 아기들을 키우게 한다면, 장담하건데 나는 어떤 아기라도 그 재능, 기호, 경향, 능력, 소질, 조상들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내가 선택한 유형의 사람-의사, 변호사, 예술가, 상인, 심지어 거지나 도둑-으로 길러 낼 수 있다.(존 B 왓슨 '행동주의')

다행스럽게도 이런 장담을 믿고 자신의 아기를 덜컥 맡긴 엄마들은 없었지만 학습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이토록 확고부동했다.

이들이 과학적으로 관찰한 대상은 사실 아이들이 아니었다.

쥐나 비둘기에게 지레누르기와 단추쪼기 등을 가르치며 실험했고 이 실험 결과를 아이들의 학습에 응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물을 대상으로 한 '강화'마저도 아무렇게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지금은 인정한다.

동물들에게 자동판매기에 포커 칩을 넣도록 훈련시키면, 닭은 그 칩을 쪼아대고 너구리는 핥아대고 돼지는 주둥이로 헤집는다.

당연하다.

만약 강화가 차곡차곡 쌓여 장기적으로 복잡한 수준까지 나아간다면 파블로프의 강아지는 지금쯤 미·적분을 풀 수 있어야 한다.

개가 음식과 연관된 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건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개란 원래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사칙연산을 하면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해도 구구단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민주적 칠판, 타블라 라사

학생을 빈 상자로 보는 건 우리나라 엄마들이 원조는 아니다.

'이제 마음이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어떻게 채워지는가?

그 종이는 어떻게 인간의 분주하고 무한한 공상에 의해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게 그려지는 광대한 내용을 획득하게 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게 되는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한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는 것이다.(존 로크,'인간오성론',1690)

경험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인간을 비어 있는 칠판을 뜻하는 '타블라 라사(tabula rasa)'로 불렀다.

타고난 능력보다는 경험과 학습에 따라 내용이 채워지는 칠판에 비유한 것이다.

인간을 타블라 라사로 보는 시각은 사실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됐다.

중세를 압박한 신분제는 계급 사이의 타고난 능력 차이를 통해 정당화됐다.

타블라 라사는 세습귀족의 우위를 부정해 신분제의 토대를 허무는 시민들의 무기였다.

3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로크적 전통은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뿌리 깊다.

능력의 우열, 인종, 성별의 차이가 사실 환경에서 비롯됐다면 환경의 변화를 통해 개선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남는 것은 이런 개선을 막는 제도적, 관습적, 관념적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일 뿐이다.

인간이 타고난 차이는 보잘 것 없고 학습과 경험, 그리고 문화적인 환경에 의해 채워지는 빈 부대와 같다는 전제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도록 돕는다.

오랫동안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의 비중을 심각하게 다루거나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한 개인 간 차이를 주목하는 학문적 흐름이 편견에 가득한 반민주적인 악덕으로 취급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선천성을 강조하는 이론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고 인간이나 문화의 개선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 과학과 민주주의

그렇다면 유전자의 영향은 일관성 있게 측정되지만 육아나 교육환경이 만드는 차이는 그렇지 못한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인간의 노력과 개선의 여지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발견은 불편한 진실이 분명하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 이것은 좋은 소식일 수도 있다.

태어나자마자 뛸 수 있는 말처럼, 엄마에게 배우지 않고도 기하학적인 줄을 깁는 거미처럼 인간도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들을 이미 타고 난다면,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유아기를 지배한 취약하거나 변덕스런 환경과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차츰 벗어날 수 있다면 불우한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다.

물론 학원을 따라 대치동으로 이사하는 엄마들의 다리에 힘이 좀 빠질지라도 변변한 시설이 없는 지방의 수재들에게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공평하다는 걸 일깨워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진실의 편에서 싸워온 민주적 전통에 비추어볼 때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면서 지켜야 하는 민주적 가치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뿐더러 혹, 있다 하더라도 진실을 외면하거나 눈을 가리는 방식으로 언제까지 지켜낼 수 있을는지는 더더욱 미심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