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래를 내던지려는 거지?"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34) 인생은 복잡하다. 진부할 정도로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가 설치한 닉슨 대통령 탄핵조사단에서 홍일점으로 활동한 장래가 촉망되던 27세의 힐러리 로뎀이 일류들이 우글거리는 동부를 뒤로 하고 아칸소 행을 선택하자 그의 절친한 친구가 막아서며 한 말이다.

아칸소 주(州)는 소득이나 교육 수준 등 주요 지표에서 미국 50개 주 중 꼴찌에서 1,2위를 다투던,미국 기준에서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일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들과 정치조직,정부기관들이 몰려 있는 동부에 남아 승부를 보아야 한다.

아칸소 같은 시골에 변호사가 할 일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성공한다고 이름을 날릴 만한 곳은 더더욱 아니다.

친구들은 시골로 간 힐러리가 일찌감치 인생의 경주에서 멀어졌다고 혀를 끌끌 찼을지 모른다.

힐러리는 20대의 결정이 남편 클린턴에 대한 순애보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살아 있는 역사')

그러나 무모해 보이는 힐러리의 선택도 수지타산을 맞춰보면 그리 터무니없는 계산은 아니었다.

힐러리는 남편 클린턴을 따라 27세의 나이에 아칸소주립대학의 법대 교수가 되었다.

남편 클린턴은 자신의 고향에서 30세에 검찰총장.

32세에 주지사가 된다.

주지사의 아내가 된 힐러리는 카터 대통령의 추천으로 미국 연방정부 산하 조직의 이사로 임명된다.

힐러리 나이 32세 때의 일이며,이 모두가 아칸소를 선택한 지 5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나면 클린턴과 힐러리는 미국의 대통령 부처가 된다.

다들 아는 대로 힐러리는 상원의원을 거쳐 미국 최초로 부부 대통령 기록에 도전하려고 한다.

힐러리는 미래를 내던졌지만 그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일종의 수익률 높은 투자였던 셈이다.

⊙ 다수를 화나게 하는 통계

지난 30년 동안 장·차관을 비롯한 주요 공직자의 대학 출신별 분포에서 서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거의 50%에 이른다.

사실 정확한 통계는 모호하다.

대학을 여러 군데 다니는 경우도 많고 장·차관의 보임 기간이 천차만별인 점도 정확하고 객관적인 수치 파악을 어렵게 한다.

그래도 한 대학의 비중이 50%에 육박한다는 건 아무래도 기분 나쁘다.

물론,그 대학 출신들은 예외겠지만.

또 다른 통계는 신빙성 있는 가상수치다.

세계적인 S그룹의 데이터.

같은 회사 같은 직급이지만 서울대 출신 부장들이 서울대 출신이 아닌 부장들보다 평균 연봉이 1000만원 더 많았다.

이 통계를 대하고도 '서울대 판'이라거나 '학벌 위주의 사회'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무 생각이 없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이다.

뭔가 부당하다.

서울대는 입시 지옥의 원흉이자 서민의 고혈을 쥐어짜는 사교육 망령을 부르는 주문이지 않은가.

서울대는 교육 문제의 실체이며 본령이다.

⊙ 그래도 통계는 따져 물어야 한다.

통계학자들은 같은 데이터에서 다른 통계도 얻었다.

토익 점수가 800점 이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평균 소득이 3000만원 더 많았다.

서울대 졸업장 때문이라는 1000만원 차이보다 영어의 듣기와 읽기 능력이 만든 차이가 훨씬 컸다면 이 데이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서울대 졸업생이기 때문에 1000만원을 더 받는다고 읽기보다는 서울대 출신들이 비교적 토익 점수가 높기 때문에 평균 연봉이 더 많은 데이터를 얻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더 낫다.

미국에서 여자 교수들의 연봉이 남자 교수들보다 평균 1000만원 적었다.

이 데이터는 남녀 차별을 주장하는 여성단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뻔했다.

그러나 통계학자들이 막아섰다.

남자건 여자건 공대 교수들의 연간 수익이 인문학 교수들의 연간 수익보다 평균 4000만원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기업 관련 프로젝트로 간혹 대박이 터지는 공대에 여자 교수가 드물었다.

남녀 교수의 연봉 차이는 대부분은 이 때문이다.

⊙ 공직배분의 정치적 이해득실

장·차관은 대통령이 선임한다.

대통령에게 공직 배분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이다.

어떤 장관 자리에 능력과 품성,충성도가 동일한 서울대 출신과 지방대 출신이 경합하고 있다면 대통령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이로울까?

'다른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전제조건에 주목하라.

정치적으로는 이 경우 지방대 출신을 선임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본다.

특정 지방대 출신을 장관에 기용하면 그 대학의 동문과 재학생,그리고 학부모와 가족도 대통령에 대한 호감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그 대학이 자리한 지역 전체가 대통령의 지지기반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다른 조건이 별로 같지 않아도 공직의 성별,직능별 지역별 안배는 민주정치의 상식이다.

정치인인 대통령들이 서울대 출신을 선호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틀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서울대 독점구조 타파를 어느 때보다 소리높여 외쳤던 참여정부의 고위 공직도 50% 가까이 서울대 출신에게 돌아갔다.

⊙ 학벌 위주의 사회도 인과관계

학벌 위주의 사회라는 말도 따져보면 인과관계다.

학벌이 좋으면 다른 능력이 좀 떨어져도 사회에서 대접받고 훨씬 더 많은 혜택과 기회를 얻는다는 해석이 숨겨져 있다.

혹은 능력이 좋은데도 학벌 때문에 대접받지 못한다는 절망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반면 아무리 학력이 좋은 사람이 성공해도 그가 다른 경쟁자에 비해 능력이 뛰어났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학벌 위주 사회의 실례로 삼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볼 때 학벌 위주의 사회를 말하는 통계도 곱씹어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한 이유다.

학벌 위주의 사회는 학벌 자체가 원인이 된다는 인과관계이기 때문이다.

서울대가 원인이 아니라 서울대는 결과이거나 지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서울대 졸업장이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상대적으로 뛰어난 인재들이 서울대학에 모인다면 인과관계를 내포하는 학벌 위주나 '서울대 판'이라는 가설은 힘이 빠진다.

⊙ 아이비리그 졸업장은 의미가 있을까?

미국에서도 동부의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다른 대학 출신들보다 2만달러(약 2000만원) 정도 연봉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연봉의 차이는 아이비리그 졸업장이 만든 것일까?

한국에는 드물지만 미국에는 아이비리그에 합격해놓고도 평범한 주립대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학생들은 일단 아이비리그 학생들과 입학 당시 실력이 대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학생들을 조사해 보면 과연 아이비리그가 평범한 학생을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지 아니면 아이비리그의 졸업장이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를 알 수 있다.

동등한 능력자들을 통해 학벌의 진짜 실력을 검증할 수 있다.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아이비리그 입학 허가를 받고도 지방 주립대를 간 학생들은 아이비리그 출신들과 연봉에서 차이가 없었다.

2만달러의 격차는 아이비리그 졸업장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입학 당시의 인력 구성에 이미 차이가 있었다는 해석을 강하게 암시한다.

(알란 크루거,스테이시 델리의 연구 'Estimating the Payoff to Attending a more selective college'/맨큐의 경제학에서 재인용) 인재들이 아이비리그에 가는 것이지 아이비리그가 유능한 인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아이비리그 졸업장이 특별한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라는 뜻.

⊙ 낭중지추(囊中之錐)

지금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비교해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연구 결과다.

그렇다며 명문대학을 가기 위한 이 많은 소란은 도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미국의 경우지 한국은 다르다고 외면하면 그만일까?

미국도 아이비리그를 향한 열정만큼은 한국의 명문대 선호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낭중지추라는 고사성어가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다.

학벌을 좇는 사람도,그 모양을 학벌 위주라 이름하며 비난하는 사람도 개인을 지나치게 무시했다.

인생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낭중지추란 주머니 속의 송곳을 말한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온다.

10대의 1~2년이 인생의 성패를 가른다면 그런 세상이 오히려 가상현실이다.

아이비리그나 명문대 졸업장이 대신 말해주는 게 많아 매우 편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고향 출신의 인재를 밀어주는 인지상정(人之常情) 또한 실재한다.

클린턴이나 힐러리나 동부에서는 보기 어려운 고속 승진을 시골에서 경쟁자 없이 누릴 수 있었고 이른 나이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다.

명문대학이라는 젊은 날의 성공에 우쭐거리며 젊음을 낭비할 수도 있지만 의지할 간판이 없어 겸손하게 매진하는 젊음이 오히려 축복받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게다가 글로벌 세상,어차피 외국에서는 서울대를 잘 모른다.

이 겨울 최선을 다하되 누구는 벅차게,또 누구는 낙심하게 하는 그 경계가 성공의 탄탄대로나 희망 없는 나락으로의 표지판은 아님을 반드시 명심하자.

경계는 때로 엄중하지만 인생은 복잡해서 또 다른 경계도 많다.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는 안목은 길고 복잡한 인생을 위해 중요하다.

남은 정시논술을 위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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