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에 가서 "만땅이요!" "만땅 넣어주세요" "입빠이요"라고 외치기보다 "가득이요" "가득 넣어 주세요"라고 하면 말도 부드럽고 뜻을 주고받기에도 편하다.

"엥꼬 났다,엥꼬다"라고 할 때도 "바닥 났다,바닥이다"라고 하면 훨씬 자연스러울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말의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그런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이런 말들은 비록 일본에서 왔지만 존재할 수 있는 근거라도 있는데 비해 아예 정체 불명,국적 불명의 단어들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마호병이나 소라색,곤색 같은 단어가 그것이다.

지금도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주 쓰이는 이런 말들은 다행히 요즘 젊은 세대에선 비교적 세력이 많이 약해져 우리말 체계에서 밀려나는 추세인 것 같다.

마호병은 뜨거운 물 따위를 넣어서 보온이 가능하게 만든 병이다.

이 말의 순화어는 '보온병'이고 지금은 대개 그렇게 쓰고들 있다.

하지만 우리말 의식이 많지 않던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생들의 소풍 길에는 으레 어머니가 챙겨주신 이 마호병이 등장하곤 했다.

'마호병'은 일본어 '마호빈(魔法甁,まほうびん)'에서 온 말이다.

오랫동안 보온이 되는 게 신기해 그네들이 '마법의 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말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서 '魔法'은 일본음으로 읽고,'甁'은 우리음을 붙였으니 국적 불명의 희한한 말이 된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쓰는 '곤색(紺色)'이나 '소라색(空色)'도 이와 똑같은 구조로 된 불구의 말이다.

'곤'이나 '소라'나 모두 일본어 'こん(紺)''そら(空)'에서 온 말이고 '색(色)'만 우리음으로 읽은 것이다.

한자 '紺'은 짙은 청색이나 군청색,짙은 남색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감'이라 읽는다.

감색 또는 진남색으로 바꿔 쓰면 된다.

'空'은 하늘이므로 空色은 바로 하늘색이다.

이를 일본음과 우리 한자음을 짬뽕한 소라색이라 말하면 자칫 조개류의 일종인 소라 껍데기 색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소라 껍데기는 검은 갈색이거나 어두운 청색을 띠므로 하늘색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중 '감색'은 약간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하늘색이니 오렌지색이니 하듯이 '감색' 하면 가을에 나는 먹는 '감'의 색깔을 연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9년에 나온 <표준 국어대사전>에서는 '잘 익은 감의 빛깔과 같은 붉은 색'으로서의 '감색(-色)'과 '검푸른 남색'으로서의 '감색(紺色)'을 모두 표제어로 올려놓고 있다.

따라서 '감색'이란 말보다는 알기 쉽게 '진남색' '검남색'을 쓰는 게 좋다.

이때 '남색(藍色)'은 사전적으로 '푸른색과 자주색의 중간색'으로 풀이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말들 가운데는 이처럼 일본말이거나 일본을 거쳐 들어온 말들이 여전히 많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그리고 언어의 순혈주의를 주장하지 않을 바에야 특정 국가 말이라고 해서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말의 형성 구조를 알고 보면 어정쩡한 불구의 상태로 돼 있는 말,우리말에도 훌륭한 단어나 표현이 본래 있는데 이걸 밀어내고 엉뚱하게 자리 잡고 있는 외래어투 등은 걸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놔둘 경우 자칫 말에서도 외래어종인 배스가 토종어류의 씨를 말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