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선학생 해부도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32) 남자도 화장하면 돈을 잘 번다고?
공부는 기대도 하지 않고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다행이라는 문제 학생들이 또 집단적으로 말썽을 피웠다.

불려와 한자리에 모인 부모들은 죄인 모양 풀이 죽어 있다.

동변상련,이해하고 위로해줄 사람들은 서로밖에 없다.

그러나 학부모들만 남겨진 공간의 공기는 싸늘하다.

서로에 대한 원망이 폭발 직전이다.

부모들은 하나 같이 우리 아이는 괜찮은데 친구를 잘못 사귀면서 비뚤어졌다고 믿고 있다.

누구 하나 자기 자식이 어쩌면 가장 악랄한 주동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친구 꼬임만 아니었다면 부모 말 잘 듣는 착실한 학생이 될 뻔했다는 것.

부모들끼리 논쟁이 시작되자 과거의 이력이 하나둘 밝혀진다.

몇몇 학생들은 다른 학교에서 전학온 지 얼마 안 된다.

그런데 먼저 학교에서도 자꾸 꼬드기는 질 나쁜 친구들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전학을 결심한 이유도 나쁜 친구들을 피해서다.

학교가 바뀌어도 순진한 아이를 가만 놔두지 않는 세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아 부모의 억장은 무너진다.

담당 선생님이나 기관의 공무원들은 이 사태를 전혀 다르게 읽는다.

유혹해오는 친구들을 피해 학교를 여기저기 옮기면서도 문제의 한 가운데 늘 끼여 있다는 그 학생이 사실은 다른 친구를 부추기는 가장 심각한 문제 학생이라고 아주 쉽게 단정한다.

순진한 학생이 한두 번 꼬임에 넘어가 휩쓸릴 수는 있지만 매번 꼬임에 넘어갔다고 보는 건 무리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학생이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며 불량한 패거리를 주동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간단하다.

같은 반 친구들이나 피해 학생들의 시각은 좀 더 싸늘하다.

주모자나 단순 가담자나 '오십보백보'라고 본다.

탈선을 꼬드기는 학생도,그 꼬임에 넘어가는 학생도 서로 비슷하기에 몰려 다녔다.

단순 가담자로 보이는 학생도 꼬임에 넘어간 게 아니라 누군가 탈선으로 인도해 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준비된 학생'들이었다는 냉철한 시각이다.

⊙ 폭력영화는 유죄일까?

청소년 폭력이 사회문제가 될 때마다 언론은 폭력영화를 문제 원인의 하나로 지목한다.

간혹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에게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느냐고 물으면 잔혹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거론하가도 한다.

물론 동일한 영화를 봤던 학생들이 모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학생들이 흔히 대답하는 이런 반론은 통계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논리다.

물론 사용하면 안 된다).

그러나 비슷한 폭력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조사하면 평범한 학생에 비해 폭력영화나 폭력이 중심인 인터넷게임에 노출된 시간이 많다는 통계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폭력장면에 노출된 시간이 많을수록 실제로 폭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간단명료하지는 않다.

폭력성향이 많은 학생들이 평소 비슷한 내용의 영화나 게임을 즐긴다고 해도 동일한 통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력영화는 이들의 행동을 유발한(cause) 원인이 아니다.

폭력영화도 폭력범죄도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일 뿐이고 이 경우 원인은 폭력성향이다.

⊙ 이름의 힘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일반적이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싫어서 나이가 들면 개명(改名)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의 흑인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사용하는 단어는 매우 독특해서 하나의 문화를 형성한다고 한다.

Looser나 Winner,혹은 King 같은 단어를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만 들어도 흑인인지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흑인 고유의 이름이 싫어 나이가 들면 법원에 개명신청을 한다.

시간이 많고 열정적인 통계학자들이 개명을 한 흑인들을 추적했다.

이름을 바꾼 흑인이 다른 조건이 비슷한 개명하지 않은 흑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잘 살았다.

자,이런 사실이 주어졌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작명(作名)업을 하는 분들은 '이름의 힘'을 증명한 데이터라고 주장하고 싶으리라.

정말,이름에는 인생을 바꾸는 신비한 마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스티븐 레빗 외,'괴짜경제학')

⊙ 통계는 뒤집어 읽는 언어

이름의 힘을 무시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납득할 만한 다른 설명도 있다.

비교적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이름도 바꾸어 보려는 요량을 내는 건지 모른다.

이 경우 개명은 잘살게 된 원인이 아니라 잘사는 것이 도리어 개명의 원인이다.

삶을 적극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고 그런 적극적인 태도가 비교적 높은 소득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이 경우에 개명이나 비교적 나은 소득은 서로 원인·결과가 아니라 삶의 의지라는 보이지 않는 원인의 각기 다른 결과다.

과학자들은 보통 무질서해 보이는 한 무더기의 통계 수치 속에서 씨름한다.

이 어지러운 숫자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어떤 패턴을 찾을 수 있다.

개명한 흑인들이 그렇지 않은 흑인보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거나,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폐암으로 더 많이 죽는다든지 하는 패턴은 학자들이 통계더미를 뒤져 보기 좋게 정렬한 인내의 결실이기도 하다.

개명과 소득수준,흡연과 폐암 사망률 같이 서로 연결돼 보이는 관계를 상관관계라고 한다.

상관관계가 높다는 말은 두 요소가 서로 강하게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상관관계는 단순히 두 개의 측정치 사이에 통계적 연계성이 있다는 말이다.

폭력영화나 게임에 노출된 시간과 폭력사건의 빈도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은 폭력영화를 많이 보거나 폭력게임을 많이 하는 학생들이 평균보다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관관계는 인과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폭력영화를 보는 빈도와 청소년 폭력사건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를 야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되레 정반대로,폭력 성향이 높은 청소년들이 폭력영화를 즐겨본다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제3의 요인 탓일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폭력영화에 무절제하게 노출될 만한 환경이 실제의 폭력행위을 제재하지 못하고 방치해 습관이 됐다고 분석해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세 가지가 모두 한꺼번에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관관계만으로는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 없다.

⊙ 직관을 억제하라

두 개의 측정치를 인과관계로 단정하려면 보다 엄밀한 검증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두 요소의 상관성이 아무리 높아도 인과관계로 단정하지 않고 유보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인과관계는 매우 강력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찾아내었다는 말은 하나의 이론을 확립했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당시 최고 부국(富國)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이 되는 것보다 인과관계 하나를 찾는 편이 훨씬 값지다는 말까지 했다.

확고한 인과관계를 하나 얻게 되면 이를 토대로 장대한 학문체계를 하나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과학자들이 찾지 못하는 인과관계를 수도 없이 만들어 낸다.

특히 언론은 과학자들의 연구가 어떤 미약한 상관관계를 보고하면 곧바로 강력한 인과관계를 암시하는 제목으로 새롭게 가공해내곤 한다.

그래야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 덕에 사람들은 '한 연구에 의하면'이라는 거부하기 어려운 관용구로 시작하는 통념을 스스로 믿고 또 널리 유포한다.

논술에서만큼은 남들이 다 읽는 방식으로 통계를 읽고 인과관계를 단정하는 습관이 치명적이다.

언론에서 같은 해석을 보았다는 말도 면책사유가 되지 못한다.

논술 출제자와 채점자는 언론인이 아니라 과학자이며 채점기준도 다수결이 아니라 과학이기 때문이다.

아래 기사 속에 인용된 통계를 기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 보자.

'화장하는 남자 연봉도 높다?'

"미국에서 요즘 남성용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포브스'가 11일 보도했습니다.

지난해 남자용 화장품은 480만달러어치가 팔려 전년보다 7%,2001년에 비해서 42% 증가했다고 하네요.

(중략) 남성들이 이렇게 외모 가꾸기에 열을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잘 생길수록 연봉도 높다고 하니까요.

2년 전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남자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은 평균 대비 4% 높은 임금을,외모가 못생긴 사람은 평균보다 9%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략)"(XX일보.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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