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알면 논술이 술술] 14.왜 어른들이 칭찬하는 모범생을 ‘범생이’라고 놀릴까?
군비경쟁의 경제학


고등학교 한 반의 학생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얌전한 아이와 노는 아이,말 많은 아이와 조용한 아이….

그런데 얌전하고 공부만 하는 학생은 어른들에게 칭찬받겠지만 또래집단에선 '범생이'로 놀림감이 된다.

이런 역설적 규범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범생이'를 미국에서는 'nerd'라고 부른다.

nerd는 '(운동이나 이성교제에 숙맥인) 바보,샌님'이란 의미다.

왜 그럴까?

학생들은 성적도 올려야 하고,어른 말씀도 잘 듣도록 교육받는다.

하지만 밤잠 줄여가며 공부하고,사춘기 반항심 누르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모두가 공부벌레처럼 판다면 성적이 오르기도 힘들다.

이런 형태의 소모적 경쟁을 경제학에선 국가 간 군비 경쟁에 비유해 '위치적 군비경쟁'(positional arms control)이라고 부른다.

군비경쟁의 경제학을 통해 세상사를 풀어보자.

⊙위치적 외부효과와 군비 통제

1980년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이 한창이었다.

서로 더 많은 핵무기,더 가공할 미사일,더 우수한 전투기 등을 만드는 데 행여 뒤질세라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결국 소련은 군비 경쟁의 후유증으로 1990년대 들어 급속히 몰락했다.

미국도 군비 부담으로 막대한 빚을 져 지금도 쌍둥이 적자(재정적자·무역적자)로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순위(상대적 위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들이 반드시 경쟁자의 순위를 하락시키는 상황을 '위치적 외부효과'라고 한다.

2등이 1등 되면,1등은 2등이 되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순위를 높이려고 앞다퉈 투자지출을 늘리지만 서로 상쇄돼 아무 효과가 없는 소모적 경쟁이 벌어진다.

바로 '위치적 군비 경쟁'이다.

미·소 군비 경쟁처럼 과열·과잉·낭비적 경쟁으로 치러야 할 비용은 점점 불어나는데 얻을 수 있는 효용은 제한적인 경우다.

군비 경쟁이 과열되고 전체 이익에 기여하지 못할 때 경쟁을 자제시키는 사회적 규범이나 법적 규제장치로서 '군비통제 협약'이 생겨난다.

위치적 외부효과와 군비 경쟁의 개념은 지난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언어영역(19~22번)에 출제된 바 있다.

⊙경쟁은 무한대,1등은 한 명뿐

위치적 군비 경쟁 현상은 골프,테니스처럼 절대기준이 아니라 상대적 순위가 매겨지는 스포츠에선 흔한 일이다.

미국 PGA 골프선수들은 대회 우승을 위해 전담 캐디,코치,심리학자,물리치료사 등을 고용하느라 큰 돈을 쓴다.

타이거 우즈,최경주 등 수십명의 정상급 선수들이 경쟁적으로 경기력 향상을 위해 투자하지만 어느 대회든 우승자는 한 명뿐이고 총상금도 변화가 없다.

각 선수는 순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므로 각자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연습량을 늘린다.

프로 농구팀들이 자유롭게 선수를 선발하지 않고 드래프트 제도를 선호하는 것도,제한 없이 경쟁하다 보면 신인선수 몸값이 무한정 올라가는 군비 경쟁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또 팀 간 전력이 엇비슷해야 경기가 재미있어 관객들이 모을 수 있다고 여긴다.

미식축구팀 공격 라인맨들의 덩치키우기(1970년 평균 120㎏→현재 150㎏)도 위치적 군비 경쟁 사례다.

양 팀이 똑같이 불어났으니 누구도 이득을 볼 수 없는 경쟁이 됐다.

⊙마릴린 먼로와 '금발이 너무해'

1950년대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를 계기로 금발 여성에 대한 미국 남성들의 선호가 극에 달했다.

많은 여성들은 금발로 염색(먼로도 실제론 금발이 아니었음)해 먼로를 흉내냈다.

하지만 동시에 "금발은 멍청하다"는 속설을 소재로 한 우스갯소리가 최불암시리즈만큼이나 많이 쏟아지기도 했다.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한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2001)를 보면 금발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여성들은 아름다움으로 경쟁한다.

이 경쟁은 학생들의 성적 경쟁보다 결코 덜하지 않아,일부에선 전신 성형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용·성형 경쟁은 갈수록 큰 비용과 다이어트 등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래서 실제 금발 여성의 머리가 나쁜지는 모르지만,금발을 놀리는 것도 '범생이' 사례처럼 역설적 규범이라 할 수 있다.

⊙경쟁해봐야 이득이 없다면…

예전에는 만 6세에도 초등학교에 보냈으나 요즘엔 제 나이 꽉 채워 보내거나 심지어 한 살 늦게 보내는 부모도 있다.

한 살 더 먹은 어린이는 상대적으로 학업성취도가 높아지고 덩치도 커서 이른바 '기죽지 않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부모들이 한 살 늦게 취학시킨다면 아무에게도 나아질 게 없이 비용만 들어 사회적으론 오히려 손실이 된다.

군비경쟁적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교육당국은 취학 연령을 엄격히 준수하게끔 규제한다.

이것이 바로 군비통제 협약과 같은 사회적 규범이 된다.

앞에서 예로 든 '범생이,nerd'도 위치적 군비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많은 학생들에게 암묵적 관행으로 빠르게 받아들여진다.

무엇보다 경쟁은 피곤하니까….

이 밖에도 프로스포츠의 엔트리(출전선수) 제한,대통령·국회의원 선거의 선거비 한도 규제,대입·입사원서의 자기소개서 분량 제한 등도 위치적 군비 경쟁과 군비통제 협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쯤 되면 세상만사 경제학으로 설명하지 못할 게 없을 것 같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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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크의 커다란 뿔도 군비경쟁의 산물

[경제를 알면 논술이 술술] 14.왜 어른들이 칭찬하는 모범생을 ‘범생이’라고 놀릴까?
로버트 프랭크 미국 코넬대 교수는 저서 '이코노믹 싱킹'에서 군비 경쟁을 설명하며 사슴의 일종인 엘크의 사례를 들었다.

엘크는 사자나 물개처럼 일부다처제를 고수하고 있고,암컷을 얻기 위해 수컷들끼리 결투를 벌인다.

주된 무기인 뿔이 클수록 싸움에 유리하다.

큰 뿔을 가질수록 더 많은 암컷을 거느리므로 큰 뿔의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지게 된다.

엘크의 뿔은 '진화 군비 경쟁'의 결정적 요소인 셈이다.

하지만 뿔이 클수록 숲속에서 늑대 같은 천적을 피해 달아날 때는 오히려 불리해진다.

엘크는 뿔 크기를 줄일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뿔이 작으면 싸움에서 불리해 암컷에 접근하기 어렵다.

결국 엘크의 진화는 안전한 삶이냐,암컷을 차지하느냐의 선택의 문제였다.

경제학자들은 지나칠 만큼 수학에 의지해 종종 "현실의 경제현상은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 뒤에 숨은 비겁자"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최근엔 쉽게 설명하는 경제학이 각광받고 있지만 왜 경제학자들은 어려운 수학을 고집할까?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로 복잡한 수리모형을 체계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일종의 군비 경쟁이다.

그래서 수학에 매달리는 경제학자들이 많아질수록 지적 능력을 인정받는 경계선도 올라가 과도한 수학적 형식주의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또한 인문학 교수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하고,그들이 쓴 책이 암호 투성이로 보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인문학 교수들은 유려한 언어능력으로 박식함을 보여주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