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찢어지게 가난 열심히…또 열심히 일했어"

[한국의 CEO-나의 성공 나의 삶]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

흔히 상투적으로 쓰이는 이 표현이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56)처럼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그가 매출 2억원의 그룹을 일구기까지의 입지전적인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1951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성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시련을 맞게 된다.

부친의 외도로 안방을 차지한 계모의 시달림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집에서 쫓겨나면서 그와 동생들도 함께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던 것.불과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졸지에 거리로 나앉게 된 식구들은 남의 집 대청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가마니만 덮고 지냈다.

급기야 어머니는 굶어죽게 된 자식들을 위해 품팔이라도 할 요량으로 객지로 떠나고,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다.

"울며불며 어머니를 떠나 보내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어쩔 수 없이 계모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온갖 구박과 매질 속에서 1년 정도 살다가 외삼촌이 쥐어 준 100원을 들고 무작정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지요."

어린 나이에 난생 처음 서울 땅(영등포역)을 밟은 성 회장은 맘씨 좋은 행인을 만나 기적처럼 식모살이로 살아가는 어머니를 찾았다.

그 뒤 노량진의 한 개척교회에 기거하며 7년 동안 낮밤을 가리지 않고 신문팔이와 약국 심부름꾼 등으로 닥치는 대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오로지 계모 밑에 있는 동생들을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서였다.

성 회장은 이때 고생한 경험이 오히려 기업가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한다.

험난한 객지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순간순간 고비가 닥치는 기업경영과도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을 고스란히 적은 책('새벽 빛')을 올해 초에 냈습니다.

누구처럼 자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나 같은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젊은 친구들이 읽고 자극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서울에서 7년간 '독하게' 돈을 모은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마련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동생들을 다시 불러모아 함께 했던 저녁이 평생 가장 맛있었던 식사라고.

어느덧 약관의 나이로 뼈가 굵은 성 회장은 조금씩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첫 데뷔(?)는 배추장사.

동네 이장 밑에서 김장용 배추를 트럭에 싣는 허드렛일로 생계를 잇던 그는 김장차가 도매시장에 배추를 떼어주고 받는 운임료가 쏠쏠하다는 걸 깨닫고는 과감하게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들여 화물차 영업점을 냈다.

당시로서는 영업점 사장 중에 가장 젊은 나이였다.

여기서 재미를 본 그는 아예 중고 화물차를 사들여 사업을 확장시키다가 우연한 계기로 지금의 본업인 건설업에 뛰어들게 됐다.

"충남 서산 해미면에서 건설업을 하던 지인이 공사권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제안하더군요.

그때는 건설업도 지입제였습니다.

건설업체가 많지 않아 시·군에 하나꼴이었지요.

그 업체들이 본사에 수수료를 주고 지역공사는 지역 업체가 도맡아 하는 거예요.

일단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돈을 긁어모으고 빚도 끌어안아 시작했습니다.

막상 해보니까 공사를 따기만 하면 25%는 남는 좋은 장사였어요."

건설업에 문외한인 그에게 시행착오가 없을 리 없었다.

그가 맡은 도로 공사가 부실 공사로 판정돼 다 뜯어내고 다시 공사를 해야 할 상황에 몰린 것.나중에 알고 보니 경험 많은 하청업체에서 제멋대로 시공한 탓이었다.

하지만 하청업체 사장들로부터는 되레 "담당 공무원에게 '봉투(촌지)'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핀잔 섞인 충고가 돌아왔다.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 그는 고민 끝에 봉투 대신 사과 한 상자를 들고 공무원의 집으로 찾아갔다.

"생면부지의 공무원 집을 찾아가기도 어색한데,봉투까지 들고 가고 싶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남의 집에 그냥 갈 수도 없고….그래서 사과 한 상자만 들고 밤중에 그 집을 찾아갔어요.

처음엔 문을 열어주지 않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사과상자는 왜 갖고 들어왔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곤 방바닥에 사과 상자를 쏟으라고 하더군요.

돈뭉치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거지요.

방바닥은 왕겨로 난장판이 됐지요(웃음)."

자초지종을 설명한 그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그 집을 나왔다.

다음 날 공사장에 출근하니 예고 없이 그 공무원이 찾아왔다.

그리곤 공무원은 그의 솔직한 자세를 칭찬하며 하청업체 사장들을 불러모아 꾸짖고는,보강 공사를 지시하는 선에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젊은 사장을 얕보던 하청업체 사장들도 그 뒤로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때를 고비로 그의 회사는 충남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설업체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정직하게 사는 게 결국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 집 가훈도 그래서 '정직하게 살자'입니다.

단타로 이득을 보기 시작하면 길게 가기가 어려워요.

인생이든 사업이든 모두 마음이 건전해야 되거든요.

사람을 뽑을 때도 이걸 가장 우선시합니다.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한 명이라도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성 회장이 사업가로서 수완을 발휘하게 된 데는 정직함 못지않게 타고난 기억력과 숫자 감각도 한몫 했다.

실제 그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줄잡아 1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성 회장에게도 콤플렉스가 있다.

어린 시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깎이 공부만큼은 성 회장을 따라갈 만한 이가 드물 정도다.

건설업계에 몸담은 지 올해로 35년째를 맞는 성 회장은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1년 내내 경제계,학계,금융계 인사들을 초청해 전문지식을 듣는 조찬모임을 갖는다.

집에서 아침을 먹는 일이 손에 꼽힐 정도다.

"생일이나 명절 때를 빼놓고는 조찬모임을 하루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만큼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과거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도 조찬모임에서 얻은 다양한 정보를 토대로 미리 원가 절감과 현금 확보에 노력을 기울여 건설업체로서는 드물게 강제 구조조정(인원감축)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게 성 회장의 설명이다.

못 배운 한을 후학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노력도 성 회장의 중요 목표 중 하나다.

그가 1990년 설립한 서산장학재단은 그동안 벌써 1만1000명의 학생에게 150억원 정도를 지원했다.

이 재단을 미국의 록펠러재단처럼 키우는 것이 성 회장의 마지막 꿈이기도 하다.

한 발 더 나아가 성 회장은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두 아들에게는 회사를 물려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공부 마치고 25.7평짜리(국민주택 규모) 아파트 한 채만 사줄 생각이에요.

부를 대물림하지 않고 멋지게 환원하는 일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정선 한국경제신문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