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나의 성공 나의 삶]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
상식을 지키는 '교과서경영'이 롱런한다


고1때 제주도로 무전여행
중·고교때 정말로 '성실하게' 놀았죠

10여년 전부터 공부에 올인
'지금 아는 만큼 과거에도 알았다면…'하는 생각 많아


'2세 경영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대개 비슷하다.

부러움,그리고 시기심."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이지,자기가 한게 뭐 있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56)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2세 경영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 크지 않았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자산 3조5000억원(작년 말 기준)짜리 중견그룹으로 키워낸 수완 때문만은 아니다.

"2세 경영인이기 때문에 더 겸손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이나,'후회 없는 판단'을 위해 매일 한두 시간씩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오너 2세는 축복임과 동시에 '고난의 길'이란 생각을 들게 한다.

문 회장은 아주그룹 창업주인 문태식 명예회장의 3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평범한 농가에서 자란 문 회장이 유복한 집안의 맏이가 된 건 1960년대 들어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란 생각에 시작한 아버지의 사업이 '대박'을 터뜨린 것.

문 회장의 부친이 뛰어든 사업은 50년 이상 묵은 나무로 만들던 전신주를 콘크리트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정부의 농어촌 전기 보급 사업과 맞물려 문 회장 부친은 승승장구했다.

서울 용두동 농가에서 장충동 저택으로 이사한 문 회장은 '잘 나가는' 사업가의 장남이 됐다.

하지만 문 회장의 부모는 한번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다만 성실할 것을 주문했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밖에 나가서 좋은 친구 많이 사귀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저는 중·고교 시절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놀 시간도 부족한데….주말마다 등산 가고,여행도 많이 다녔지요.

고1 때는 제주도를 무전여행으로 다녀오기도 했어요.

말 그대로 '성실하게' 놀았죠."

부잣집 맏이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군대였다.

문 회장은 1970년대 초반에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에서 꼬박 35개월을 복무했다.

수경사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사건' 때문에 창설된 서울 경비부대로,국가 대표급 권투선수와 씨름선수들이 가는 '무시무시한' 부대였다.

서울에서 근무한다는 생각에 자원한 문 회장은 수경사의 실상을 알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부대원끼리 권투 시합을 하는 훈련이 있었어요.

라운드 없이 어느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 진행하는 룰이었죠.제가 운동선수들이랑 상대가 됩니까?

만날 KO가 됐죠. 어떻게 보면 곱게 자랐던 제가 처음 느꼈던 진한 고통이었어요.

하지만 세상에 얻어맞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습니까?

신참 때 매도 많이 맞고 숱한 고생을 하고 나니까 두려운 게 없어지더군요.

경영을 하면서도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죠."

문 회장의 외아들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최근 해병대를 제대했다.

"제가 아들에게 '아빠는 힘든 부대 가서 고생 많이 했지만 보람도 많았다'고 넌지시 말했더니,대뜸 해병대에 가겠다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사람들이 자기를 '부잣집 외아들이니 언제 한번 고생해봤겠어'라는 식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이런 선입견을 없애고 앞으로 당당해지려면 힘든 부대에서 고생 좀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더군요."

문 회장은 첫 직장으로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를 택했다.

처음부터 오너 아들로 일하면 직장인의 애환을 평생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5년6개월 동안 '대우맨'으로 일하면서 거둔 최고의 수확은 '부지런함'이었다.

"새벽부터 밤 9시까지 아무도 퇴근 안하는 분위기였죠.제겐 '성실함'이란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는 기회였어요.

20대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해요.

어떤 습관을 갖느냐에 따라 인생 후반이 달라집니다.

습관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몸에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도전하는 것.

이 세 가지 습관은 창업을 하건,샐러리맨이 되건 공통적으로 필요한 습관입니다."

문 회장이 본가인 아주로 옮겨온 건 1983년이었다.

당시 아주는 탄탄한 회사였지만 전신주와 건설용 건자재 사업 외엔 없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문 회장은 직접 500개에 달하는 사업 아이템을 검토해 레미콘 사업 진출,상봉터미널 건설,마포 서교호텔 인수 등의 성과를 일궈냈다.

아주가 중견그룹으로 도약하는 시기는 외환위기 직후였다.

재무상태가 워낙 좋았던 덕에 다른 기업들과 달리 외환위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아주그룹은 산업장비 렌털,렌터카(에이비스 렌터카),자동차 할부금융업체(대우캐피탈)에 잇따라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바람과 함께 산업계를 강타한 노사분규는 문 회장을 코너로 몰아넣기도 했다.

한번은 노조원들이 문 회장을 감금한 뒤 시너통을 메고 들어와 '안 들어 주면 죽겠다'면서 담배를 피운 적도 있다고 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사회가 안정되고,문 회장이 투명경영을 한층 강화하자 노사 분규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문 회장이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 1~2시간은 경영학 관련 서적을 읽는 데 할애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제 판단은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너무 많아요.

제가 10여년 전부터 공부에 '올인'하는 이유예요.

'지금 내가 아는 만큼 과거에 알았더라면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 때문이죠.

앞으로도 판단해야 할 일이 숱한데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공부하는 겁니다."

'공부하는 경영자'답게 그는 경영의 모든 방편은 책에 있다고 강조한다.

"저는 '경영은 순진하게 해야 한다'고 믿어요.

책에 나온 대로 하면 됩니다.

누구나 아는 거지만 실제 이렇게 하는 기업은 많지 않아요.

'나만의 경영비법'으로 성공한다는 건 단기간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어렵습니다.

고(故) 이병철 회장도 특별한 경영기술이 있었다기보다는 '교과서'적인 상식을 가장 잘 지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오너 2세'에 대한 대중의 부러움과 시기에 대해 문 회장의 생각은 어떨까.

"엄청난 혜택임에 틀림없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큽니다.

저는 스스로를 '릴레이 2번 주자'라고 생각해요.

아버님이 일으킨 사업을 더 잘 키워서 다음 주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내가 0.1초라도 단축하는 게 다음 주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오상헌 한국경제신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