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미영이의 눈
미영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어느 날 미영이는 학교에서 치른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왔다. 엄마는 딸아이의 시험지에 커다랗게 X표가 쳐 있는 그림에 가서 눈이 멎었다. 시험문제는 그림으로 돼 있었다. 고즈넉한 시골의 가을 풍경. 기와집이 한 채 있고 앞마당에선 사내아이 하나가 제기를 차고 있다. 그 곁에는 동생이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제기를 세고 있다. 울타리 옆 장독대에선 저녁을 준비하려는 듯 어머니가 항아리들을 들춰 보고 있다. 뒷산에 해가 지고 있고 붉은 노을이 능선을 따라 퍼져 있다.
'위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미영이는 '4명'이라고 써 놓았다. 선생님은 빨간 색연필로 X표를 하고 옆에 '3'이라고 고쳐 주셨다. 미영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눈에 무심코 그림이 다시 보였다. 기와집 툇마루 밑엔 툭 튀어나온 툇돌이 놓여 있었고,거기엔 고무신 한 짝이 안쪽으로 포개져 있었다. 낮잠을 주무시던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문고리를 밀고 나오실 것 같은 풍경이었다.(오태민 외,'여백의 질서')
◎인상파의 승리
두 그림은 대조적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은 화가가 세밀한 묘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쏟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구본과 악보는 확대경으로 보아도 될 만큼 내용이 모두 들어 있다. 털의 감촉을 붓 끝으로 일일이 재현한 카펫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면 미술 문외한도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화가는 보이는 모든 것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다.
인간 집중력의 위대함을 보여준 '대사들'보다 3세기 늦은 모네의 '생 라자르역'(1877)은 어떤 측면에서 판단하면 매우 불성실하다. 대충 그리다 만 붓질,가까이서 보면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윤곽선은 예술을 사칭한 아이들의 장난 같다. 미술가란 일반인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완전에 가까운 재현 능력을 갖춘 이들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19세기 화단에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휘슬러라는 한 인상파 화가는 이틀간의 붓질로 그린 그림에 엄청난 금액을 매겼다고 한 비평가에 의해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의 승리는 확고했다. 인상파의 그림은 이전까지의 어떤 다른 양식보다 생동감 있으며 오히려 사실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생 라자르역의 기차가 정말로 기적을 울리며 이제 막 역에 다다르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예술은 불완전한 감각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의 감각이 지금보다 훨씬 예민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예술은 그 형태나 방식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훨씬 민감한 감각은 인류가 영위해온 예술을 감상하기에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초에 수십 컷의 정지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속된 사진을 보면서 움직임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기 위해서는 눈이 잔상(殘像)을 보아야 한다. 잔상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결함이다. 짧은 순간을 포착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영화산업은 정지 화면들을 보면서도 동영상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시각적 결함에 기초하고 있다. 종이 위의 그림이나 활자를 알아본다는 자체가 시각적 한계 때문에 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판판해 보이는 종이의 표면도 확대해 보면 잔털이 수북한 3차원 공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종이 표면에 뭔가를 쓴다는 것은 잔디밭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래도 우리는 매끈한 직선과 평면을 볼 수 있다. 미세한 색감의 차이도 알아채기 위해 화가들은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지만 목표를 초과해 예리해지면 색이라는 특성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지 모른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의 차이는 사실 빛의 파장의 차이다. 예리한 감각기관은 에너지의 미묘한 차이도 감지하겠지만 색감이라는 일종의 '아름다운 착각'은 느낄 수 없을지 모른다.(라이프니츠,'인간 오성에 관한 새 논문들')
라디오가 없어도 전파 자체를 들을 수 있지만 공기압의 주기적인 밀소(密疏)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착각하지 못하는 슈퍼맨을 상상해 보면 도움이 된다. 이 슈퍼맨은 음 하나하나를 정해진 파동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하모니를 느낄 수 없다. 옥타브가 다르면 소리의 물리량이 명백하게 다르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은 음간의 거리가 일정하면 다른 옥타브로 연주해도 같은 노래로 알아듣지만 이 슈퍼맨에게는 전혀 다른 소리의 집합일 뿐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드라마나 소설에 빠져 들지만 슈퍼맨에게는 오류덩어리 거짓일 뿐이라 몰두하고 싶어도 도저히 몰두할 수 없다. 괜히 옆에서 같이 TV를 보는 사람만 피해를 본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인간의 상상력은 부정확한 감각을 보완하는데 탁월하다. 우리 눈은 다 보지 않고도 대상을 볼 수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과 탁월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코를 쳐박고 보면 불성실한 붓질일 뿐이지만 그림 전체를 시야에 넣으면 어느새 꿈틀거리는 사람이나 마차의 일부로 살아난다. 인상파 화가들은 인간의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적절한 암시만 주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는 전체 형태들을 짜 맞추어 보여준다. 게다가 감상자가 상상력을 동원,완성해야만 하는 그림이 오히려 생동감이 넘쳤다. 낱낱의 사실을 세밀하게 그려 넣는 것보다 희뿌연 연막 속에 기차의 윤곽만 던져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심지어는 사실적이라는 차원에서도 더 나았다. 어차피 인간의 눈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화폭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사실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이다. 정보의 양 자체는 많겠지만 그 정보가 과연 얼마나 사실과 닮았는지는 의심스럽다. 감상자는 화가의 눈,화가의 손을 거쳐 해석되고 틀어진 사실들을 접할 뿐이다. 인상파의 그림은 오히려 정보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감상자는 부족한 정보를 자신의 인식,자신의 경험,자신의 상상력으로 보완한다. 사실적이라는 말이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가리킨다면 감상자의 사고습관에 많은 것을 맡기는 인상파의 그림이야말로 더 사실적일 수 있는 셈이다. 감상자는 자신이 믿는 사실적인 기차역의 모습을 인상파의 불완전한 그림 위에 덧씌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 속에 있구나
'不知身在畵圖中(내가 그림 속에 들어 있구나!)' 한시(漢詩)의 한 구절인 이 말은 동양미술이 지향하는 이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정도전,'滿地紅')
동양미술은 오래 전부터 사실을 모사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신 감상자가 그림 속에 들어가 화가의 정신세계 속에 거닐며 아름다움에 흠뻑 젖는 것이 목표였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模寫)해야 하는 서양미술에서는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은 여백이 오랫동안 터부였지만,동양미술에서 여백은 그림의 일부이며 감상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미영이는 무엇을 보았나. 왜 보이는 대로 보지 못했나. 툇돌 위의 고무신만으로도 할머니를 볼 수 있는 아이는 그만 그림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이 일화는 예술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태도를 담아내고 있다.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과 인간의 유별난 상상력이 뒤엉켜 빚어내는 그 오래된 사연을 말이다.
미영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어느 날 미영이는 학교에서 치른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왔다. 엄마는 딸아이의 시험지에 커다랗게 X표가 쳐 있는 그림에 가서 눈이 멎었다. 시험문제는 그림으로 돼 있었다. 고즈넉한 시골의 가을 풍경. 기와집이 한 채 있고 앞마당에선 사내아이 하나가 제기를 차고 있다. 그 곁에는 동생이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제기를 세고 있다. 울타리 옆 장독대에선 저녁을 준비하려는 듯 어머니가 항아리들을 들춰 보고 있다. 뒷산에 해가 지고 있고 붉은 노을이 능선을 따라 퍼져 있다.
'위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미영이는 '4명'이라고 써 놓았다. 선생님은 빨간 색연필로 X표를 하고 옆에 '3'이라고 고쳐 주셨다. 미영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눈에 무심코 그림이 다시 보였다. 기와집 툇마루 밑엔 툭 튀어나온 툇돌이 놓여 있었고,거기엔 고무신 한 짝이 안쪽으로 포개져 있었다. 낮잠을 주무시던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문고리를 밀고 나오실 것 같은 풍경이었다.(오태민 외,'여백의 질서')
◎인상파의 승리
두 그림은 대조적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은 화가가 세밀한 묘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쏟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구본과 악보는 확대경으로 보아도 될 만큼 내용이 모두 들어 있다. 털의 감촉을 붓 끝으로 일일이 재현한 카펫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면 미술 문외한도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화가는 보이는 모든 것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다.
인간 집중력의 위대함을 보여준 '대사들'보다 3세기 늦은 모네의 '생 라자르역'(1877)은 어떤 측면에서 판단하면 매우 불성실하다. 대충 그리다 만 붓질,가까이서 보면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윤곽선은 예술을 사칭한 아이들의 장난 같다. 미술가란 일반인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완전에 가까운 재현 능력을 갖춘 이들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19세기 화단에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휘슬러라는 한 인상파 화가는 이틀간의 붓질로 그린 그림에 엄청난 금액을 매겼다고 한 비평가에 의해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의 승리는 확고했다. 인상파의 그림은 이전까지의 어떤 다른 양식보다 생동감 있으며 오히려 사실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생 라자르역의 기차가 정말로 기적을 울리며 이제 막 역에 다다르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예술은 불완전한 감각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의 감각이 지금보다 훨씬 예민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예술은 그 형태나 방식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훨씬 민감한 감각은 인류가 영위해온 예술을 감상하기에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초에 수십 컷의 정지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속된 사진을 보면서 움직임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기 위해서는 눈이 잔상(殘像)을 보아야 한다. 잔상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결함이다. 짧은 순간을 포착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영화산업은 정지 화면들을 보면서도 동영상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시각적 결함에 기초하고 있다. 종이 위의 그림이나 활자를 알아본다는 자체가 시각적 한계 때문에 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판판해 보이는 종이의 표면도 확대해 보면 잔털이 수북한 3차원 공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종이 표면에 뭔가를 쓴다는 것은 잔디밭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래도 우리는 매끈한 직선과 평면을 볼 수 있다. 미세한 색감의 차이도 알아채기 위해 화가들은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지만 목표를 초과해 예리해지면 색이라는 특성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지 모른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의 차이는 사실 빛의 파장의 차이다. 예리한 감각기관은 에너지의 미묘한 차이도 감지하겠지만 색감이라는 일종의 '아름다운 착각'은 느낄 수 없을지 모른다.(라이프니츠,'인간 오성에 관한 새 논문들')
라디오가 없어도 전파 자체를 들을 수 있지만 공기압의 주기적인 밀소(密疏)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착각하지 못하는 슈퍼맨을 상상해 보면 도움이 된다. 이 슈퍼맨은 음 하나하나를 정해진 파동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하모니를 느낄 수 없다. 옥타브가 다르면 소리의 물리량이 명백하게 다르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은 음간의 거리가 일정하면 다른 옥타브로 연주해도 같은 노래로 알아듣지만 이 슈퍼맨에게는 전혀 다른 소리의 집합일 뿐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드라마나 소설에 빠져 들지만 슈퍼맨에게는 오류덩어리 거짓일 뿐이라 몰두하고 싶어도 도저히 몰두할 수 없다. 괜히 옆에서 같이 TV를 보는 사람만 피해를 본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인간의 상상력은 부정확한 감각을 보완하는데 탁월하다. 우리 눈은 다 보지 않고도 대상을 볼 수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과 탁월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코를 쳐박고 보면 불성실한 붓질일 뿐이지만 그림 전체를 시야에 넣으면 어느새 꿈틀거리는 사람이나 마차의 일부로 살아난다. 인상파 화가들은 인간의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적절한 암시만 주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는 전체 형태들을 짜 맞추어 보여준다. 게다가 감상자가 상상력을 동원,완성해야만 하는 그림이 오히려 생동감이 넘쳤다. 낱낱의 사실을 세밀하게 그려 넣는 것보다 희뿌연 연막 속에 기차의 윤곽만 던져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심지어는 사실적이라는 차원에서도 더 나았다. 어차피 인간의 눈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화폭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사실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이다. 정보의 양 자체는 많겠지만 그 정보가 과연 얼마나 사실과 닮았는지는 의심스럽다. 감상자는 화가의 눈,화가의 손을 거쳐 해석되고 틀어진 사실들을 접할 뿐이다. 인상파의 그림은 오히려 정보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감상자는 부족한 정보를 자신의 인식,자신의 경험,자신의 상상력으로 보완한다. 사실적이라는 말이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가리킨다면 감상자의 사고습관에 많은 것을 맡기는 인상파의 그림이야말로 더 사실적일 수 있는 셈이다. 감상자는 자신이 믿는 사실적인 기차역의 모습을 인상파의 불완전한 그림 위에 덧씌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 속에 있구나
'不知身在畵圖中(내가 그림 속에 들어 있구나!)' 한시(漢詩)의 한 구절인 이 말은 동양미술이 지향하는 이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정도전,'滿地紅')
동양미술은 오래 전부터 사실을 모사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신 감상자가 그림 속에 들어가 화가의 정신세계 속에 거닐며 아름다움에 흠뻑 젖는 것이 목표였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模寫)해야 하는 서양미술에서는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은 여백이 오랫동안 터부였지만,동양미술에서 여백은 그림의 일부이며 감상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미영이는 무엇을 보았나. 왜 보이는 대로 보지 못했나. 툇돌 위의 고무신만으로도 할머니를 볼 수 있는 아이는 그만 그림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이 일화는 예술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태도를 담아내고 있다.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과 인간의 유별난 상상력이 뒤엉켜 빚어내는 그 오래된 사연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