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나가라, 시장의 99%가 바깥에 있다"
창업가들에게 기업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창업자의 철학, 능력, 스타일에 따라 회사의 운명과 문화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제약업계에서 매우 독특한 기업으로 통한다. 연매출 675억원에 불과하지만 '한국인이 주인인 다국적 제약기업'을 표방하며 일찌감치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을 뿐 아니라 만주 지역 독립유공자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이런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의 강덕영 사장(60) 역시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자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진 그는 간혹 무신론자들로부터는 '광신도', 기독교 신자들로부터는 '이단'이라는 억울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가 강연을 나가는 일부 대학에서는 '최고의 CEO 강사'로 불리기도 한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그가 매월 자택에서 개최하는 '작은 음악회'는 제약업계뿐 아니라 의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강 사장 스스로도 "제약업계에서 워낙에 '돈키호테'로 소문이 나 있어 별로 친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강 사장은 부친이 자그마한 사업을 한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여곡절도 많았다.
"4살 때 6ㆍ25가 터졌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학생복 만드는 일을 하셨죠. 하루는 어머니께서 직원들에게 줄 저녁식사로 커다란 가마솥에 호박찌개를 끓이고 있었는데, 제가 그만 거기에 빠져버린 겁니다.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죠. 결국 가족들은 피난가는 걸 포기했습니다. 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 밤샘 기도를 시작하셨죠. 그리고 약이 없어 마당에 심어놓은 옥잠화 잎으로 치료를 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3개월 정도가 지나자 깨끗이 완치가 된겁니다. 그것도 흉터 하나 없이."
강 사장은 과거에 이른바 '깡패학교'로 유명한 서울 중동고를 졸업했다.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중동고는 '깡패학교'로 이름을 날렸죠. 중동고 모자만 쓰고 나가면 동네 유명한 깡패들도 친한 척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경복고에도 깡패가 많았는데, 이놈들이 운동화를 질질 끌고 지나가다가도 우리학교 앞에만 오면 신발을 바로 신고 지나갈 정도였죠."
강 사장은 키는 큰 편이 아니지만 어깨가 딱 벌어져 전형적으로 단단한 체구를 갖추고 있다. "사장님도 주먹 꽤나 쓰셨을 것 같은데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강 사장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나는 소위 '범생이 계열'에 속했어요. 그래서 싸움을 별로 안했어요. 사실 중동고는 모두가 싸움을 잘 하니 오히려 학교 내에선 서로 싸우지를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떡대'가 좋아서 반에서 랭킹 10위 안에는 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중동에서 반에서 10위 안이면 상당한 거예요."
강 사장은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업들에 수출을 적극 독려하던 때라 무역학과를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서 많은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건 무역업이 아닌 제약업이었다.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사 산도스가 그가 택한 첫 직장이었다.
"제약쪽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군복무 후 1971년에 사회에 나오니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어요. 이력서를 20통 준비해서 사람 뽑는다는 데가 있으면 무조건 지원했어요. 그래서 겨우 취직된 곳이 산도스였어요."
"만약 직장을 골라서 갈 수 있었다면 어디에 들어가고 싶었나"란 질문을 던져봤다. 강 사장은 "나도 사실 기자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그 당시 젊은 사람들은 신문사나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죠"라고 대답했다.
산도스 시절 강 사장은 잘 나가는 영업사원이었다. 단 한 번도 목표치에 미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웃지 못할 일화도 많았다.
"한번은 산부인과 제품이 있어서 부산 침례병원을 갔었는데, 몇 번을 찾아가도 의사가 안 만나주는 거예요. 하도 안 만나줘서 다짜고짜 수술방에 쳐들어 갔는데, 산모가 애를 낳고 있더군요. 순간 당황했는데, 이 양반도 웃긴 게 나더러 들어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의사가 웃으면서 '나도 강씨지만, 니 고집도 참 지독하구나'라고 하더군요. 결국 제품을 사줬어요. '강씨 고집'으로 끝장 낸거죠."
군사독재 시절 혹독한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1980년대 초에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마자 기업 비리조사를 대대적으로 한 적이 있었죠. 제약회사 차례가 됐을 때 내가 제일 영업 잘하는 명단에 들어 있었는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갔죠. 당시 영업차장이었는데 판촉비 준 거 다 불라고 하더군요. 의자밖에 없는 2평짜리 방에서 엄청나게 맞았어요. 어떤 회사 영업사원은 하도 맞아서 미쳐버렸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산도스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직후인 1981년 강 사장은 드디어 의약품 수입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남들보다 승진도 빠르고 안정된 상태였지만 독립하고 싶은 욕망이 솟았다"고 한다. 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창업해서 성공할 확률이 1% 정도밖에 안되는데,난 1% 안에 들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훗날 한국유나이티드 제약의 모태가 됐다.
강 사장이 유나이티드제약을 지금까지 키워 온 비결은 적극적인 세계화다. 그는 대학생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도 항상 세계화를 강조한다."세계화가 안되면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전체 시장이 100%라면 99%가 바깥에 있어요. 한국은 1%밖에 안되요. 그 1%만 바라보면서 우물쭈물 하다간 죽습니다."
강 사장은 역사, 철학, 종교 등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면 해외시장 개척이 훨씬 쉬워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른바 '문화 마케팅'이다.
"에티오피아 기업인을 만났을 때 과거 에티오피아는 로마 제국에 맞섰던 유일한 나라이며, 솔로몬 왕의 장남이 에티오피아의 왕이 됐기 때문에 솔로몬의 후예들이라고 얘기해줬죠. 그랬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좋아하더군요. 그 다음부터 사업 얘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김동윤 한국경제신문 기자 oasis93@hankyung.com
창업가들에게 기업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창업자의 철학, 능력, 스타일에 따라 회사의 운명과 문화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제약업계에서 매우 독특한 기업으로 통한다. 연매출 675억원에 불과하지만 '한국인이 주인인 다국적 제약기업'을 표방하며 일찌감치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을 뿐 아니라 만주 지역 독립유공자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이런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의 강덕영 사장(60) 역시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자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진 그는 간혹 무신론자들로부터는 '광신도', 기독교 신자들로부터는 '이단'이라는 억울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가 강연을 나가는 일부 대학에서는 '최고의 CEO 강사'로 불리기도 한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그가 매월 자택에서 개최하는 '작은 음악회'는 제약업계뿐 아니라 의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강 사장 스스로도 "제약업계에서 워낙에 '돈키호테'로 소문이 나 있어 별로 친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강 사장은 부친이 자그마한 사업을 한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여곡절도 많았다.
"4살 때 6ㆍ25가 터졌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학생복 만드는 일을 하셨죠. 하루는 어머니께서 직원들에게 줄 저녁식사로 커다란 가마솥에 호박찌개를 끓이고 있었는데, 제가 그만 거기에 빠져버린 겁니다.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죠. 결국 가족들은 피난가는 걸 포기했습니다. 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 밤샘 기도를 시작하셨죠. 그리고 약이 없어 마당에 심어놓은 옥잠화 잎으로 치료를 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3개월 정도가 지나자 깨끗이 완치가 된겁니다. 그것도 흉터 하나 없이."
강 사장은 과거에 이른바 '깡패학교'로 유명한 서울 중동고를 졸업했다.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중동고는 '깡패학교'로 이름을 날렸죠. 중동고 모자만 쓰고 나가면 동네 유명한 깡패들도 친한 척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경복고에도 깡패가 많았는데, 이놈들이 운동화를 질질 끌고 지나가다가도 우리학교 앞에만 오면 신발을 바로 신고 지나갈 정도였죠."
강 사장은 키는 큰 편이 아니지만 어깨가 딱 벌어져 전형적으로 단단한 체구를 갖추고 있다. "사장님도 주먹 꽤나 쓰셨을 것 같은데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강 사장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나는 소위 '범생이 계열'에 속했어요. 그래서 싸움을 별로 안했어요. 사실 중동고는 모두가 싸움을 잘 하니 오히려 학교 내에선 서로 싸우지를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떡대'가 좋아서 반에서 랭킹 10위 안에는 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중동에서 반에서 10위 안이면 상당한 거예요."
강 사장은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업들에 수출을 적극 독려하던 때라 무역학과를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서 많은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건 무역업이 아닌 제약업이었다.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사 산도스가 그가 택한 첫 직장이었다.
"제약쪽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군복무 후 1971년에 사회에 나오니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어요. 이력서를 20통 준비해서 사람 뽑는다는 데가 있으면 무조건 지원했어요. 그래서 겨우 취직된 곳이 산도스였어요."
"만약 직장을 골라서 갈 수 있었다면 어디에 들어가고 싶었나"란 질문을 던져봤다. 강 사장은 "나도 사실 기자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그 당시 젊은 사람들은 신문사나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죠"라고 대답했다.
산도스 시절 강 사장은 잘 나가는 영업사원이었다. 단 한 번도 목표치에 미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웃지 못할 일화도 많았다.
"한번은 산부인과 제품이 있어서 부산 침례병원을 갔었는데, 몇 번을 찾아가도 의사가 안 만나주는 거예요. 하도 안 만나줘서 다짜고짜 수술방에 쳐들어 갔는데, 산모가 애를 낳고 있더군요. 순간 당황했는데, 이 양반도 웃긴 게 나더러 들어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의사가 웃으면서 '나도 강씨지만, 니 고집도 참 지독하구나'라고 하더군요. 결국 제품을 사줬어요. '강씨 고집'으로 끝장 낸거죠."
군사독재 시절 혹독한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1980년대 초에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마자 기업 비리조사를 대대적으로 한 적이 있었죠. 제약회사 차례가 됐을 때 내가 제일 영업 잘하는 명단에 들어 있었는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갔죠. 당시 영업차장이었는데 판촉비 준 거 다 불라고 하더군요. 의자밖에 없는 2평짜리 방에서 엄청나게 맞았어요. 어떤 회사 영업사원은 하도 맞아서 미쳐버렸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산도스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직후인 1981년 강 사장은 드디어 의약품 수입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남들보다 승진도 빠르고 안정된 상태였지만 독립하고 싶은 욕망이 솟았다"고 한다. 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창업해서 성공할 확률이 1% 정도밖에 안되는데,난 1% 안에 들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훗날 한국유나이티드 제약의 모태가 됐다.
강 사장이 유나이티드제약을 지금까지 키워 온 비결은 적극적인 세계화다. 그는 대학생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도 항상 세계화를 강조한다."세계화가 안되면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전체 시장이 100%라면 99%가 바깥에 있어요. 한국은 1%밖에 안되요. 그 1%만 바라보면서 우물쭈물 하다간 죽습니다."
강 사장은 역사, 철학, 종교 등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면 해외시장 개척이 훨씬 쉬워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른바 '문화 마케팅'이다.
"에티오피아 기업인을 만났을 때 과거 에티오피아는 로마 제국에 맞섰던 유일한 나라이며, 솔로몬 왕의 장남이 에티오피아의 왕이 됐기 때문에 솔로몬의 후예들이라고 얘기해줬죠. 그랬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좋아하더군요. 그 다음부터 사업 얘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김동윤 한국경제신문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