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빅딜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한국의 CEO-나의 성공 나의 삶] 구자홍 동양투신운용 부회장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마치 무인(武人)을 연상케 했다.

구자홍 동양투신운용 부회장(57)의 첫 인상이다.

1949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난 구 부회장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주로 유학을 나와 평생 '객지생활'을 했다.

하지만 막상 직접 접해보니 그는 풍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최고경영자(CEO)였다.

인간미 넘치는 솔직함이 구수한 '촌놈(?)'의 말투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대화를 유쾌하게 이끄는 유머와 재치도 일품이다.

구 부회장의 유년 생활은 바로 '원가도 안들어간 인생'으로 압축된다.

자신에게 들어간 원가가 저렴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손해볼 게 없다는 얘기다.

"저는 원가가 저렴한 사람이에요.

과외도 못 받았고 등록금도 장학금으로 메웠습니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 다닐 때 등록금이 1만6000원이었죠.입주 과외로 생활비도 대고요.

그래서 뭘 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구 부회장의 '저렴한' 생활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전주로 혼자 하숙을 나온 것.12살 때부터 혼자 하숙생활을 하면서 전주 유학을 한 셈이다.

그래서 전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지금 생각해봐도 초등학교 때 전주로 이사오길 잘 한 것 같아요.

그때 계속 시골에 있었으면 농사짓고 있었겠죠.그것도 좋긴 하지만 지금 같은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생의 빅딜'을 한 셈이죠."

구 부회장은 전주고(1967년)와 서울대 상대(1972년)를 졸업한 수재형이다.

1973년에 행정고시에 합격,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경제기획원에 근무할 때 국내 해운·조선업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을 맡았다.

그는 국비 유학생 1호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교통관련 정책을 공부하면서 고시공부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문제는 귀국 이후였다.

경제기획원 내에서 과장직을 거치면서 공직자로 살아오던 그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공직보다는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공직을 그만 둘 때 집사람이 엄청 반대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펄펄 뛰셨죠.그래도 결심이 변하진 않더라구요.

나 혼자 구름 잡는 일해서 뭐하나 하는….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 그 월급 갖고 애들 대학 교육도 못 시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년 정도 고민하다가 때려치우고 나왔죠.하지만 미련은 없습니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박봉흠씨와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조학국씨 등 쟁쟁한 사람들이 고시 동기들이었죠.사실 그때는 저도 잘 나가는 편이었어요.

어쨌든 지금은 집사람이 제일 좋아합니다.

그때 잘 나왔다고.저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요.

왜냐고요.

제가 가족들을 잘 보살필 수 있으니까요.

장관하는 것보다,꿈을 작게 잡으니까 마음도 편하더라구요."

구 부회장은 동부그룹 종합조정실 이사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물론 기업이 공직과는 다른 점이 많지만 빠르게 적응했다.

정책과 전략을 판단하는 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동부를 떠났다.

"한 5년이 지나니까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님하고 의견 차이가 조금씩 생기더라구요.

동부그룹을 퇴사하기 며칠 전에 김 회장님과 술잔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회장님께 많이 배웠다고 했죠.그게 사실이고요.

제게는 고마운 분입니다."

구 부회장은 동양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념 전 장관과 서울대 동기인 채오병 동양그룹 사장이 구 부회장을 추천한 것.구 부회장은 동양에 둥지를 틀면서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인품에 반했다고 한다.

현 회장의 인품,영어 실력,교양,지식 등이 모두 구 부회장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금융 및 보험 담당 전무를 지내던 구 부회장은 입사한 지 100일 정도 후에 현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아멕스카드를 인수하니까 맡아서 해보라는 얘기였다.

"1995년이었죠.지금의 동양카드 전신인 아멕스카드에 가보니 눈앞에 캄캄했어요.

십수년을 적자 내던 회사였으니까.

가맹점 수는 1만2000개에 회원은 5만명 정도였죠.당시는 정말 보잘 것 없는 회사였어요.

하지만 일 하는 것은 그때가 제일 재미있어어요.

처음 사장을 해보는 데다,회사 키우는 보람도 있었고요.

그때부터 매달 호프데이도 하고 퇴근할 때 불켜진 사무실 있으면 직원들 데리고 나가서 술 사주고 그랬죠."

이후 구 부회장은 동양카드를 살려내고 1998년 동양생명을 맡았다.

동양생명 역시 쓰러지기 직전의 회사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동양생명 사장으로 가자마자 동네방네 뛰어다닌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구 부회장.하지만 그에겐 동양생명의 브랜드인 수호천사가 평생의 자랑이 됐다.

그만큼 수호천사에 대해 할 얘기도 많았다.

"수호천사 얘기가 나오면 아직도 가슴이 뜁니다.

동양생명에서 수호천사라는 브랜드 만들고 쓰러지기 직전의 회사를 1000억원대 이익이 나는 회사로 바꿨으니까요.

당시 보험상품 구조도 저축성 보험 위주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 보장성 보험으로 바꿨습니다.

특히 수호천사에 대한 자부심은 크죠.대한민국 보험 역사상 브랜드 마케팅은 제가 처음 했거든요.

아마 은퇴하고도 두고두고 가장 보람찬 일로 기억될 겁니다."

그가 만든 브랜드 수호천사를 얘기하다보면 광고를 빼놓을 수 없다.

구 부회장 자신이 발가벗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를 신문 광고에 공개하면서 신뢰감을 심어준 것이다.

"광고 시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던 어느날 담당 임원이 와서 극약 처방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냐고 했더니,글쎄 발가벗으라는 겁니다.

어떻게 벗냐고 물었죠.예전에 베네통 사장이 발가벗고 히트를 쳤으니,저보고 주민등록번호를 공개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신문 광고에 내 사진하고 주민등록번호 490214….다 적어놨어요.

제 웃는 얼굴 사진하고요.

믿고 맡기라는 뜻이었죠.그게 수호천사 광고였습니다.

대 히트작이었죠.이후 여자 애인이 군대가는 역발상 광고 등 무수한 대박 광고가 이어졌습니다."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구 부회장은 수호천사 브랜드를 일궈내는 동시에 동양생명을 살려냈다.

2003년에는 동양시스템즈를 경영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최근에는 한일합섬을 맡아 건설,레저,기계 등 의류와 관계 없는 사업부문을 모두 떼어내는 작업도 진두지휘했다.

의류 및 패션 전문기업으로의 초석을 닦아놓은 셈이다.

결국 구 부회장은 관(官)에서 민(民)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구조조정 업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래서 구 부회장은 기업에서 구조조정을 가장 많이 한 CEO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10여년이 넘게 CEO를 해온 구 부회장은 인생의 선배로서 직장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절대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말 하는 직원을 제일 싫어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봐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자꾸 돌려서 이야기하다 보면,거짓말도 하고 나쁜 짓도 하게 되죠.저는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 밖에 모르는 직원보다 때로는 윗사람에게 거슬리게 들릴지라도 할 말은 하는 직원이 좋습니다.

그게 진정한 상하 관계죠.서로를 위할 줄 아는 것이고요."

장창민 한국경제신문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