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선 해설위원의 퇴장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21) 경험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시원시원한 축구해설로 인기를 모았던 신문선 해설위원. 그의 "골, 골이에요"라는 말은 한때 유행어였다.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다보면 딱딱해지기 마련이지만 그의 해설은 전문성과 엔터테인먼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대중은 그의 이런 파격을 사랑했다.

2006년 월드컵. 한국대표팀은 스위스에 2 대 0으로 무릎을 꿇었고 16강 진출은 좌절되었다. 치열한 중계방송 경쟁을 벌이던 다른 방송국의 해설위원들은 판정을 비난했다. 신씨만은 주심이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봤다고 평가했다. 방송국은 시청률 때문이라며 월드컵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해고했다. 이 이례적인 도중하차는 단순히 시청률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방송계의 정설이다. 대중을 분노케 한 그의 해설이 문제였다.

네티즌들은 신씨의 그간의 해설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좋아했던 그의 어록을 다시 들먹이며 전문성 없는 개그맨이었을 뿐이라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이들 네티즌이야말로 한때 신씨의 오락적인 해설에 광분하면서 '신문선 어록'을 만들어 유포하던 주역들이었다.

◆엿장사 맘대로

옛날, 중국에 왕의 사랑을 받던 젊은 신하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신하는 임금의 마차를 타고 궁 밖을 나갔다. 임금의 마차를 하락 없이 타고 궁을 나간 신하는 형벌을 받는 것이 왕명으로 된 법이었다. 이 젊은 신하를 질시하는 무리가 임금께 일러바쳤다. 임금께 불려나온 신하는 집의 노모(老母)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겨를 없이 가장 빠른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고 아뢰었다. 왕은 이 신하를 고발(告發)한 신하들 앞에서 젊은 신하의 효심을 칭찬해 주었다. 자기가 받을 벌조차 두려워 않고 노모를 걱정한 효심을 말이다.

또 어느 날 젊은 신하는 왕과 함께 복숭아 농장에 시찰을 나갔다. 복숭아가 잘 익었는가를 알기 위해 하나를 따서 맛을 보던 신하가 제 먹던 것을 옆에 있던 왕에게 권하였다. 왕은 그 복숭아를 받아먹었다. 이를 지켜본 다른 신하들은 젊은 신하의 무례함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번에도 이 신하를 감쌌다. 신하가 베어 문 복숭아의 맛은 1000개 중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한 것이었고 이 젊은 신하는 왕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만 소소한 예절은 까맣게 잊을 정도였던 것이라니 왕을 사랑하는 신하의 마음이 갸륵하다고 말이다.

세월이 흘러 신하는 늙고 수려함을 잃었다. 이제 왕은 이 신하가 싫어졌다. 어떤 사소한 사건에 이 신하가 연루되자 왕은 가차 없이 신하를 문초토록 명하였다. 예전 같으면 문제 삼지 않을 일이었으나 왕은 담당자에게 이 신하의 역심(逆心)을 찾아내라고까지 말했다. 역심의 근거로 왕이 일컬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놈은 예전에 나의 총애를 이용해 나의 마차를 허락도 없이 타고 궁 밖으로 나가 이를 금지한 왕명을 가벼이 여겼고, 또 어느 날은 제 먹던 복숭아를 짐에게 권할 정도로 왕을 업수이 여겼다." (한비자)

◆뉴욕타임즈 마음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비도 많이 왔다. 방학 잘 지냈냐는 인사에 학생들이 답한다. 아열대를 경험하고야 말았노라고 말이다.

지난해 12월, 겨울치고는 따듯한 날이 많았다. 지구온난화에 열성인 뉴욕타임즈는 연일 온난화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2월이 되자 이번에는 한파가 몰아쳤다. 뉴욕타임즈 2월7일자는 '온난한 겨울의 뼈아픈 반전'(In Midwest, a Bitter Turn In a Temperate Winter)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물론, 이번에는 지구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는 심층기사를 내지는 않았다. 4월 봄바람과 함께 맞게 되어 있는 부활절. 폭설이 내려 미국인들은 성탄절 같은 부활절을 보냈다. 뉴욕타임즈는 이상하게 추운 봄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겨울에 따듯한 날도 있을 수 있고 봄에 눈도 올 수 있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저만치 혼자 피어있는 산유화 같다. 예상과 다른 어떤 모습이라도 그건 원래 복잡한 자연의 일면이라고, 인간의 제한된 지성이 포착하지 못한 자연의 본모습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순서요 예의다. 이상 한파가 몰아쳤다고 지구가 추워지고 있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곤란하다. 그러니 신중한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온당하다. 그러나 만일 2월에도 춥지 않고 더웠다면, 부활절에 아이들이 수영복을 입고 달걀을 찾아야 했다면 뉴욕타임즈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지구온난화 전도사를 자처하는 뉴욕타임즈의 행태로 보아 전문가들을 동원해 끝장나버린 지구의 기상시스템에 대해서 경고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이 여름 우리나라 학생들이 경험한 것은 아열대가 아니다. 평년보다 비가 많으면서도 더운 또 하나의 독특한 여름일 뿐이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그 미묘한 현상을 대중적으로 경험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덥고 비가 많았던 하나의 여름이 아열대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춥거나 10월에 내린 폭설 하나로 새로운 빙하기의 시작을 단정하는 것도 부조리하다.

◆내가 보는 것은 사실인가?

왕의 마음이 간사하다. 같은 행동도 때로는 충성의 발로로 보기도 하고 역심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왕만이 아니다. 똑 같은 스타일의 축구해설을, 때론 호의로 때론 악의로 대하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모습이다. 신문은 자신이 믿는 것에 부합하는 사건은 '증거'로 대우하고 일치하지 않는 사건은 '예외'로 취급한다. 인간의 한계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같은 사실도 본 사람에 따라 묘사가 다른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동일한 사물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이 논리를 좀 더 확장하면 '내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라는 철학적 회의에 도달하고 만다.

◆뇌가 본다

시지각(視知覺)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물을 보는 것은 눈보다는 뇌라고 한다. 나면서부터 앞이 보이지 않거나 아주 어렸을 때 실명을 했다가 성인이 된 후에 시각을 되찾은 사람들은 사물을 어떻게 볼까? 만약 '본다'라는 행위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정적이라면 갑자기 찾아온 광명으로 잠시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시력이라는 새로운 감각기관을 얻은 이들은 이를 사용할 줄 몰랐다. 이들은 대체로 본다는 감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도 빛의 혼란스런 뒤섞임 이상으로 해석해내지 못했다.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사물간의 비례적 관계. 사물의 경계, 그리고 거리와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사물의 일관성을 알아채지 못한다. 어른이 된 다음 시력을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올리버 색스 '화성의 인류학자')

애초에 보는 행위를 몰랐던 사람이나 알았다가 되찾은 사람이나 망막에 맺히는 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이 신호를 종합해서 해석하는 뇌에 있다. 일반인들은 쉽다고 생각하는 본다는 행위를 컴퓨터로 실현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망막에 맺힌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면 안 된다. 필요한 것만을 뽑아내고 필요 없는 것은 무시해야 한다. 그리고 미세한 차이도 증폭해서 볼 것인지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한 대상으로 처리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또 보는 관점에 따라 변하는 상(象)을 같은 대상으로 볼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대용량 컴퓨터는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활주로 모습의 변화를 동일한 활주로로 이해하는 것도 힘들어 한다고 한다. 하물며 활주로 주변에서 움직이는 온갖 사물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동선을 예측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보통사람은 순식간에 해버리니 놀라운 일이다. 유아시절 시지각을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능력을 갖기 어렵다. 해석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보지 못한다. 본다는 행위는 수동적인 흡수가 아니다. 훈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해석과 판단이다.

◆경험은 해석이다

경험을 강조하다보면 인간의 마음을 백지라고 전제한다. 경험을 통해 백지가 채워지는 이미지를 그린다. 그러나 마음이 개입하지 않으면 경험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바보라도 동일한 경험을 반복하면 배우게 된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같은 경험을 두 번 할 수 없다. 세상에 완전히 동일한 사건이 두 번 일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동일한 경험이라고 묶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경험하기 전에 동일한 경험이라는 해석이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경험을 통해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경험을 분류하는 해석을 동원하고 말았다. 이 해석의 도움 없이는 유사한 경험을 수백 번하고도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경험을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것은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차이는 경험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 경험을 통해 배울 것인지, 혹은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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