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후보의 깨끗한 승복

절차적 민주주의 이뤄내

[Focus] 한나라 전당대회 경선이 남긴 것들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정치에 있어 절차적 민주주의가 존중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직접선거 또는 국민에 의해 위임받은 조직 등을 통해 정치가 이뤄지는지,권력에 도전하는 많은 정당들이 있는지,정당한 선거에 의해 합법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는지,법치주의에 입각한 공정한 통치가 되고 있는지 등이다. 정당이 공직에 나서려는 사람을 공개적인 경쟁과정을 통해 뽑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주요한 한 형태다.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절차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나라당이 수개월의 경쟁 과정을 거쳐 지난 19일 경선을 실시하고 다음날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 후보를 정한 것은 한국 정당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패배한 후보가 그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인 것도 우리나라 정당사에 전례 없던 일이어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와 선호 여부를 불문하고 이번 경선 과정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그동안 대선 후보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패배자가 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경선 과정에서 패배가 예상될 경우 상대 후보들을 비난하면서 정당을 나가버리거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가 탈당하면서 독자적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등 파행적인 상황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정당 사상 최초의 민주적 경선은 김영삼·김대중 대선 후보가 맞붙은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를 꼽는다. 패배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섬으로써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전당대회가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군사독재 시절엔 공작정치로 인해 제대로 된 경선과 전당대회가 자리잡을 겨를이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경선 결과에 대한 반발과 탈당 등으로 인해 적지 않은 후유증을 겪었다. 1992년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맞붙었던 이종찬 후보가 불공정 시비 끝에 경선에 불참한 게 단적인 예다. 1997년 경선에서 진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을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하면서 따로 출마했다. 2002년 민주당 경선은 이른바 '노풍(盧風ㆍ노무현 후보 바람)'으로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상당수 후보들이 중도에 그만두면서 의미가 반감됐다. 특히 이인제 의원은 경선에서 패배한 후 또 탈당,오점을 남겼다. 이 같은 경선 불복을 막기 위해 정치권은 경선 후보자가 탈당 후 대선에 독자 출마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이번 당 경선에 국민의 의견을 50% 반영한 것도 의미가 있다. 한나라당은 경선 선거인단 18만5080명을 선정했다. 이 중 50%는 당원과 당 대의원 중에 뽑았다. 3 0%는 일반국민 중에 선발했다. 나머지 20%는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로 채웠다.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도 국민참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올해 한나라당이 이를 이어받음으로써 당 경선에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제도가 고착화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민주신당'도 올해 대선 경선에 국민참여 경선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당 대선 후보 경선에 국민의 의사를 묻는 제도가 있다. 미국 선거제도는 예비선거와 본선거로 나뉜다. 예비선거는 민주·공화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제도인데,각 주별로 규정이 달라 매우 복잡하다. 예비선거 방식으론 일반 유권자도 참여하는 '프라이머리'와 열성당원으로만 제한하는 '코커스'가 있다. 50개주 가운데 약 40개주가 프라이머리를 채택하고,10개주 정도가 코커스를 연다.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그 과정은 험난했다. 경선 세부 규칙을 정할 때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서로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기도 했다. 2004년 3월부터 2년여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이른바 당심(黨心)을 많이 확보한 박 후보는 당원들의 참여 비율을 늘리자고 주장했다. 반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높았던 이 후보는 여론조사 반영비율을 높이자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마찰을 빚은 것이다. 지난 5~6월 양측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한나라당이 '두나라당'이 될 수 있다는 얘기마저 나왔다. 결국 두 후보가 서로 한 발짝씩 물러나,극적인 타협을 이룸으로써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1차 관문은 넘었지만,그 이후 경선 과정도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서로의 허물을 캐내 '사생결단'식으로 공격했다. 막판 박 후보 측은 '이명박 본선 필패론'을 내세워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이 후보 측은 '독재적 발상'이라고 반박하면서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경선 자체가 이뤄질 수 없는 것 아니냐,경선 결과에 불복할 것이라는 말들이 돌았다. 전국을 돌며 13차례 실시된 합동연설회에선 상대 후보를 향한 야유와 고성이 오갔다. 피켓으로 상대편을 위협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러다가 1976년 폭력배가 동원된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의 악몽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경선은 실시됐다. 전당대회에서 이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자 박 후보는 "경선 패배를 인정한다""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후보님,진심으로 축하드린다"며 "오늘부터 저는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강조,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패배한 후보가 불복을 선언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차원에서 전당대회 캐치프레이즈를 '아름다운 동행'으로 정했는데,박 후보의 승복 선언으로 이를 이룰 수 있었다.

이번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또 하나의 정치 실험이 있었다. 정당 사상 첫 청문회가 개최됐다. 청문회는 후보들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실시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한나라당은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강행했다.

한나라당 경선은 물론 숙제도 남겼다. 전당대회 때까지 토론→다수결 원칙 존중→합의가 실천됐다는 측면에서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상대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볼썽사나운 격한 싸움은 그 한계를 넘나들었다. 내용적 민주주의를 담보하기는 아직 미숙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만들어 이를 지키면서 정당하게 경쟁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절차의 성공'이라는 면에서 이번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한국 민주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사례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정치도 그만큼 성숙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기자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