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많은 증권사 버리고 모험 가득한 해운사로 전직
영업 체질에 맞아 승승장구
이종철 STX팬오션 사장의 별명은 '영국 신사'다. 1980년대 후반 런던 주재원으로 근무한데다 부하 직원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쓸 정도로 매너가 있다는 이유에서 회사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
하지만 실제 만나 본 이 사장은 풍부한 감성과 수준급 유머를 겸비한 '재담가'라는 별명이 더 어울릴 법 했다. 어떤 주제에도 막히지 않을 정도로 해박했고,민감한 질문은 특유의 위트로 교묘하게 피해갔다.
깔끔한 외모와 달리 이 사장은 넉넉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6ㆍ25 전쟁 끝 무렵에 해병으로 복무한 탓에 섬(연평도)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뒤늦게 뭍(인천)으로 올라가자고 결정한 건 어머니였다.
"연평도에 병원이 없는 탓에 형과 동생이 모두 병으로 죽었거든요. 원래 3남4녀였는데 남자라곤 달랑 저만 남게 됐죠. 어머니가 '여기 있다간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죽겠다'고 해서 피신하듯 나왔지요."
이 사장은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즐거운 추억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어릴 때 양껏 못 먹었던 탓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금도 '식탐'이 있다고 했다.
인천 생활도 쉽지만은 않았다. '연평도 촌놈'에게 인천은 너무나 큰 무대였다. 연평도 우등생이었던 이 사장은 인천으로 전학한 뒤 처음 본 시험에서 '전교 꼴찌' 성적표를 받아야 했다.
다시 어머니가 나섰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이 사장에게 과외공부를 시켜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것. 당시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상대로 과외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사장의 담인 선생님은 이 사장의 됨됨이와 어려운 형편을 감안해 공짜로 과외공부를 시켜줬고, 이 사장의 성적은 쑥쑥 올랐다.
이 사장은 당시 명문이었던 제물포 고등학교를 나와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온 가세를 동원해 '집안 대표'로 대학에 들어갔다.
"가난 때문에 가장 슬펐던 일이라면 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걸 꼽겠어요. 충분히 자질이 있는데도 저 때문에 희생했으니….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여서 더 안타깝지요."
대학에 입학한 이 사장은 당시 유행하던 '입주 과외'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숙식을 제공받고 월 2만~3만원 정도를 '급여'로 받았다. 당시 등록금이 5만8000원 정도였으니 꽤나 고액이던 셈이다.
이 사장은 법대를 다녔지만 고시 대신 회사를 선택했다. 고시를 할 만큼 집안 형편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사시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요즘엔 사시 패스한 친구들이 CEO가 된 자신을 부러워한다고도 했다.
첫 직장은 당시 최대 증권사인 삼보증권(대우증권 전신)이었다. 하지만 보다 활동적인 일을 꿈꾸던 그에게 증권사 기획실은 따분하기만 했다. 2년가량 흐른 어느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범양상선이 그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한눈에 반했어요. 여기 저기서 영어로 전화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멋져 보였거든요. 범양상선의 월급이 삼보증권보다 작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이 사장은 범양상선에서 승승장구했다. 특히 벌크(석탄 등 건화물을 실어나르는 배) 영업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다. 승률이 90%에 달할 정도였다.
"해운업은 마치 도박처럼 투기적인 성격이 강해요. 그게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얼마 전 김진명씨가 쓴 '도박사'란 책을 보면 '프로 도박사가 돈을 잃지 않는 비결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란 구절이 나와요. 해운도 배를 빌리는 가격이 낮을 때 배를 빌리고,배 값이 쌀 때 조선소에 발주를 해야 돈을 벌거든요."
이 사장은 승승장구했지만, 범양상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또 다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탄탄한 회사였지만 10년 넘게 법정관리 상태에 처한 탓에 범양상선은 서서히 성장동력을 잃어만 갔다. 때마침 나타난 사람이 STX그룹을 이끄는 강덕수 회장이었다.
범양상선을 인수한 강 회장은 사명을 STX팬오션으로 바꾼 뒤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STX팬오션은 국내 최대 벌크선 업체로 우뚝 섰고, 요즘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 사장은 "기업은 잘 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며 요즘 걱정이 많다고 했다. 가진 게 있으면 그걸 지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는 "CEO의 걱정은 오너 경영인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영화 '트로이'를 보면 '신도 인간을 질투한다'는 말이 나와요. 신은 죽을 수 없잖아요. 죽을 수 있는 것도 옵션인데. 그런 점이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차이에요. 오너는 기업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오너는 무한책임을 갖고 끝까지 기업과 함께 합니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시각이 달라요."
요즘 CEO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단번에 "메가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란 답이 돌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산업계의 큰 움직임을 경영진이 읽어내느냐, 읽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존폐가 달려 있다는 이유에서다. 자신도 몇 년 전 '중국발 해운 호황이 올 것'이란 메가 트렌드를 제대로 읽지 못해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며, 앞으로 승부는 메가 트렌드를 읽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칭찬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요리 한답시고 오이를 썰 때 집사람이 '잘한다'고 칭찬해 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구요. 집사람이 만약 '이 인간이 뭐 이렇게 썰어' 그랬으면 제가 다시 칼질을 했겠습니까. '칭찬은 질책보다 효과가 있다'는 걸 몸소 깨달았죠."
젊은 직장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직원들한테 '회사는 냉정하고 인색한 곳'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느 회사가 직원들에게 10을 투자했는데 직원들이 8만 가져온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은 근본적으로 직원들에게 인색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때로는 회사도 직원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웬만한 실수를 용인해 주기도 합니다. 회사(경영진)와 직원들은 마치 부부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서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상헌 한국경제신문 기자 ohyeah@hankyung.com
영업 체질에 맞아 승승장구
이종철 STX팬오션 사장의 별명은 '영국 신사'다. 1980년대 후반 런던 주재원으로 근무한데다 부하 직원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쓸 정도로 매너가 있다는 이유에서 회사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
하지만 실제 만나 본 이 사장은 풍부한 감성과 수준급 유머를 겸비한 '재담가'라는 별명이 더 어울릴 법 했다. 어떤 주제에도 막히지 않을 정도로 해박했고,민감한 질문은 특유의 위트로 교묘하게 피해갔다.
깔끔한 외모와 달리 이 사장은 넉넉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6ㆍ25 전쟁 끝 무렵에 해병으로 복무한 탓에 섬(연평도)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뒤늦게 뭍(인천)으로 올라가자고 결정한 건 어머니였다.
"연평도에 병원이 없는 탓에 형과 동생이 모두 병으로 죽었거든요. 원래 3남4녀였는데 남자라곤 달랑 저만 남게 됐죠. 어머니가 '여기 있다간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죽겠다'고 해서 피신하듯 나왔지요."
이 사장은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즐거운 추억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어릴 때 양껏 못 먹었던 탓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금도 '식탐'이 있다고 했다.
인천 생활도 쉽지만은 않았다. '연평도 촌놈'에게 인천은 너무나 큰 무대였다. 연평도 우등생이었던 이 사장은 인천으로 전학한 뒤 처음 본 시험에서 '전교 꼴찌' 성적표를 받아야 했다.
다시 어머니가 나섰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이 사장에게 과외공부를 시켜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것. 당시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상대로 과외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사장의 담인 선생님은 이 사장의 됨됨이와 어려운 형편을 감안해 공짜로 과외공부를 시켜줬고, 이 사장의 성적은 쑥쑥 올랐다.
이 사장은 당시 명문이었던 제물포 고등학교를 나와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온 가세를 동원해 '집안 대표'로 대학에 들어갔다.
"가난 때문에 가장 슬펐던 일이라면 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걸 꼽겠어요. 충분히 자질이 있는데도 저 때문에 희생했으니….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여서 더 안타깝지요."
대학에 입학한 이 사장은 당시 유행하던 '입주 과외'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숙식을 제공받고 월 2만~3만원 정도를 '급여'로 받았다. 당시 등록금이 5만8000원 정도였으니 꽤나 고액이던 셈이다.
이 사장은 법대를 다녔지만 고시 대신 회사를 선택했다. 고시를 할 만큼 집안 형편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사시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요즘엔 사시 패스한 친구들이 CEO가 된 자신을 부러워한다고도 했다.
첫 직장은 당시 최대 증권사인 삼보증권(대우증권 전신)이었다. 하지만 보다 활동적인 일을 꿈꾸던 그에게 증권사 기획실은 따분하기만 했다. 2년가량 흐른 어느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범양상선이 그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한눈에 반했어요. 여기 저기서 영어로 전화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멋져 보였거든요. 범양상선의 월급이 삼보증권보다 작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이 사장은 범양상선에서 승승장구했다. 특히 벌크(석탄 등 건화물을 실어나르는 배) 영업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다. 승률이 90%에 달할 정도였다.
"해운업은 마치 도박처럼 투기적인 성격이 강해요. 그게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얼마 전 김진명씨가 쓴 '도박사'란 책을 보면 '프로 도박사가 돈을 잃지 않는 비결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란 구절이 나와요. 해운도 배를 빌리는 가격이 낮을 때 배를 빌리고,배 값이 쌀 때 조선소에 발주를 해야 돈을 벌거든요."
이 사장은 승승장구했지만, 범양상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또 다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탄탄한 회사였지만 10년 넘게 법정관리 상태에 처한 탓에 범양상선은 서서히 성장동력을 잃어만 갔다. 때마침 나타난 사람이 STX그룹을 이끄는 강덕수 회장이었다.
범양상선을 인수한 강 회장은 사명을 STX팬오션으로 바꾼 뒤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STX팬오션은 국내 최대 벌크선 업체로 우뚝 섰고, 요즘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 사장은 "기업은 잘 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며 요즘 걱정이 많다고 했다. 가진 게 있으면 그걸 지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는 "CEO의 걱정은 오너 경영인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영화 '트로이'를 보면 '신도 인간을 질투한다'는 말이 나와요. 신은 죽을 수 없잖아요. 죽을 수 있는 것도 옵션인데. 그런 점이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차이에요. 오너는 기업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오너는 무한책임을 갖고 끝까지 기업과 함께 합니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시각이 달라요."
요즘 CEO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단번에 "메가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란 답이 돌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산업계의 큰 움직임을 경영진이 읽어내느냐, 읽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존폐가 달려 있다는 이유에서다. 자신도 몇 년 전 '중국발 해운 호황이 올 것'이란 메가 트렌드를 제대로 읽지 못해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며, 앞으로 승부는 메가 트렌드를 읽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칭찬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요리 한답시고 오이를 썰 때 집사람이 '잘한다'고 칭찬해 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구요. 집사람이 만약 '이 인간이 뭐 이렇게 썰어' 그랬으면 제가 다시 칼질을 했겠습니까. '칭찬은 질책보다 효과가 있다'는 걸 몸소 깨달았죠."
젊은 직장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직원들한테 '회사는 냉정하고 인색한 곳'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느 회사가 직원들에게 10을 투자했는데 직원들이 8만 가져온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은 근본적으로 직원들에게 인색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때로는 회사도 직원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웬만한 실수를 용인해 주기도 합니다. 회사(경영진)와 직원들은 마치 부부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서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상헌 한국경제신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