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소비하는 것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19) 악마는 그대를 단기적으로 유혹한다
10년 동안 공부하면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영어교육 광고와 6개월만 하면 귀가 뚫린다는 광고가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믿을 만한가? 그야 당연히 10년이다. 그렇다면 어느 광고를 유심히 읽게 되고 결국 돈을 내게 될까? 그건 아무래도 6개월 쪽이다.

소비자들은 효과가 나타나는 기간의 장단(長短)에 민감하다. 3년 동안 꾸준히 읽고 쓰면 논술시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다 안다. 그래도 수능이 끝나고 1개월짜리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하루 한 시간씩 운동을 하거나 그냥 걷기만 해도 건강해지고 남부럽지 않은 몸매를 만들 수 있다. 그래도 돈을 쓰는 쪽은 먹기만 하면 되는 건강보조식품과 1개월에 10kg이 빠지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다. 장기적인 처방은 믿을 만하고 저렴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단기적인 처방은 신뢰하기 어렵다. 게다가 비싸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눈에 띄는 변화에 기꺼이 지불한다.

◆다이어트의 진실

살을 빼는 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요는 유지가 안 된다는 게 문제다. 단기적으로 살을 뺄 수 있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흔하다. 정 안 되면 굶어도 되고 수술도 있다. 의학은 비만과의 싸움에 힘에 달리고 사실상 패배하고 있다고 자인한다. 병적비만을 위해 고안된 위절개나 소장우회술 같은 시술은 수술 중에 사망할 수도 있지만 효과도 단기적일 뿐이다. 위의 80~90%나 쓸모없게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이 찐다. 환자는 고열량의 음식을 조금씩 자주 섭취하는 방식으로 작아진 위에 저항한다. 턱의 일부를 변형해 고형의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해도 고열량의 드링크를 통해 살이 쪘다.('나는 고백한다,현대의학을' 아톨가완디) 비만과 싸우는 의사들은 인간의 몸이 '형상기억합금'처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힘이 강하다고 실토한다. 더구나 이 힘의 원천이 몸보다도 뇌에 있다고 추정한다. 뇌를 통제하기 전에는 외과적 방법을 통한 비만치료의 효과는 사실상 일시적일 뿐이라는 말이다.

◆논술준비,읽고 쓰기만 빼고 다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도서 구입비는 월 8000원이 안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며 담배 소비 월 2만2000원,화장품 1만1000원과 비교해도 처참한 수준이다. 지난 2~3년간 논술이 국민적 관심사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흥미롭다. 논술 붐이 독서 행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독서라는 정공법을 선택한 학생이나 학부모가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울대 권장도서처럼 어려운 책을 읽히는 논술학습법에 문제가 있다는 우려도 극히 일부의 사례를 지나치게 과장했던 셈이다. 대다수 학생에게 논술은 수능 끝나고 한두 달 바짝 준비하는 또 하나의 과목일 뿐이다. 족집게 학원 강사의 예상문제 풀이와 잡다한 배경지식을 순식간에 머리에 입력하는 암기과목이다. 학생들은 논술을 위해 독서와 사색,꾸준한 글쓰기만 빼고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논술문제가 지나치게 어려우니 제발 교과과정에 맞춰 달라는 주문은 사실은 익숙한 학습 즉,외우기,찍기,벼락치기만으로도 충분한 시험으로 만들어 달라는 생떼였는지 모른다.

◆그래도 합리적인 소비

단기적인 해법을 제시하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사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동일하다. 바로 정신적 위안. 불안의 해소. 정신적인 만족이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비싼 돈을 내는 이유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돈 안들이고도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불확실한 방법에 돈을 지불하는 행태를 설명하기 어렵다. 건강을 위해,영어를 위해,논술을 위해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정신적 위안치고는 그래도 싸게 먹히는 셈이다. 시간당 수십만원 하는 정신과 상담이나 우울증 치료보다는 어쨌건 저렴하지 않은가?

◆장기적으로 우린 모두 죽는다

영화가 재미있느냐를 가지고도 치열한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디워의 한 장면. 부라퀴의 목표가 새라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수사당국은 그녀를 조용히 없애버리려고 한다. 새라를 죽이려는 책임자에게 이든(남자주인공)이 반박한다. 어차피 비극은 반복될 것이라고. '그래 나도 안다. 그러나 그건 500년 뒤의 일이다.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수사관의 답이다.

이 대사는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의 전매특허였다.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옹호한다. 그에게 있어 시장은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유능한 운전자가 수리해가며 몰아야 한다. 고용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 단기적으로 국민총생산은 늘어난다. 소득이 늘어난 근로자들이 소비를 시작하면 정책의 효과는 파급된다. 그러나 정부가 사용한 자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업의 원천이 세금이라면 국민의 주머니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고 국가가 국민 대신 소비한 셈이다. 파급효과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사업의 원천이 국민 저축이라면 다른 사업가가 빌릴 돈을 정부가 가로챘을 뿐이다. 정부는 지출 자체에 의미를 두지만 사업가는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저축도 기업이 쓰도록 놔두는 게 오히려 더 낫다는 논리다. 화폐를 찍어내서 사용하면?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거나 저축을 가로챈 건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 역시 공짜는 아니다. 인플레이션이라는 형태로 국민경제가 지불한다. 인플레이션도 세금의 일종이다. 저축을 많이 할수록 처벌받게 되는 세금이다. 정통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처방이 단기적일 뿐이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해롭다고 공격할 때 케인스는 답한다. '그렇다고 해도,장기적으로 우린 모두 죽는다.'

◆민주주의의 유혹

소비자들이 반짝 효과에 큰 비용을 지불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역시 단기처방의 유혹에 약하다. 대학 입학시험을 코앞에 둔 고 3 학생들이 자신들의 입시제도를 투표로 결정한다고 하자. 이때 입시안은 두 가지다. 3년 동안의 실력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제도와 운에 좌우되는 제도. 운에 좌우되는 제도가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 요행을 선택하면 혹시 자기 차례가 올지 모르지만 실력으로는 기대할 게 없는 학생들이 언제나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당장 1학년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나중에 운에 좌우되는 입시안을 선택할 생각을 하고 3년 동안 놀아버린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핵심 원리는 사실 논리적으로는 옹호하기 매우 어렵다. 게임 참가자들에게 언제나 룰을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되면 다수는 패자에게 덜 불리한 쪽으로 규칙을 변경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덜 가혹한 게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무산되어버린다. 카드빚이나 농가부채를 주기적으로 탕감해주면 빚을 갚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상속세를 벌칙금처럼 매기면 노년은 소비의 향연이 될 것이다. 공부를 안 한 학생에게도 동일한 기회를 주는 제도는 교육부가 나서 공부하지 말라고 독려하는 셈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비민주적 제도

선거를 앞둔 대통령과 여당에는 돈이 풀리거나 대규모 정부공사 때문에 일자리가 늘고 경제가 활력을 얻는 게 유리하다. 유권자가 선거 이후에 닥칠 인플레이션보다 당장의 호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들의 임기는 14년이다. 통화량과 이자율을 결정하는 이 기구가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찌 보면 대통령보다도 크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임기가 길어 선거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핵심적인 제도지만 비민주적이다. 성숙한 민주주의 속에는 이런 비민주주적인 제도들이 요소요소 숨어 있다. 민주주의라는 말에 얽매이다 보면 민주주의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글:송근일 (명지외고 2학년)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아프간 한국인 인질 사태와 관련하여 엄청난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탈레반 수감자를 석방하자니 테러집단을 대하는 원칙이 무너져 미국의 위신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국민들이 아프간뿐만 아니라 이라크,코소보 등의 분쟁 지역에서 인질로 납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자니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생명을 무시했다'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을 수도 있고,아까운 생명을 버릴 수도 있다. (…) 사람들은 왜 이러한 궁극적인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단기적인 선택은 금방 피부에 와닿는다. 또한 그 이후 그러한 단기적 선택에 의해 나온 참혹한 결과도 이전의 단기적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 이 딜레마는 결론을 내리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결론을 내려야 한다면 그 결론이 극단적이든 절충적이든 절대로 '테러집단과 협상은 없다'라는 원칙은 훼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납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테러집단으로 흘러들어가는 새로운 돈줄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소중한 생명을 허무하게 희생시키지 않는 진정한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