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나 정치권에서 당장의 정치적인 생색에 '연연한' 나머지 압력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중략) 국민은 돈이 많이 드는 직업관료제를 세금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집착하여 미련을 두다'란 뜻의 '연연(戀戀)하다'는 자동사로,'그는 돈에 연연한다' '하찮은 일에 연연하지 마라'처럼 쓰인다. 여기서 '연연한'은 정상적으로 쓰였고 자연스럽다.

"올해도 내수시장에 '연연해하는' 기업들은 도태하는 반면 해외로 뛰는 기업들은 대도약의 기회를 잡을 것이다."

현재의 문법적 틀에서 '연연해하는'은 잘못 쓴 표현이다.'연연하다' 자체가 동사이므로 구태여 접사 '-하다'를 덧붙여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문장에서 정상적 어법인 '내수시장에 연연하는 기업들은…'이라 했을 때 사람에 따라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연연하는'보다 '연연해하는'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연연하다'란 단어가 사람들의 인식에 형용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형용사인 경우는 '아파하다' '예뻐하다'처럼 '-어하다'를 붙여 동사로 만들어 쓰는 기능이 있다. '연연하다'는 사전적으로는 동사로 분류돼 있지만 의미적으로는 '상태성'을 강하게 띤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동작성을 좀더 주기 위해 접사 '-하다'를 심리적으로 붙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런 유형의 단어들을 따로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견해는 하나의 대안이 될 만하다. 가령 '밝다'는 우리 인식에 분명 형용사인데,동시에 동사로서의 쓰임새도 갖고 있다. '날이 밝는다'에서는 분명히 동사다. 이는 날이 점차 밝아오는 진행상을 갖는 말이다. '연연하다'를 비롯해 '꺼리다,내키다'같이 형용사와 동사의 경계선 상에 있는 단어들을 딱 잘라 동사로 규정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지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켜하다,꺼려하다,연연해하다'와 같은 표현을 동사의 제한적 용법으로 인정하자는 일부 견해는 이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이런 비규범적 표현에서 '화자의 심리적 객관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가)나는 거기 가는 걸 꺼렸다.

(나)그는 거기 가는 걸 꺼려했다.

여기서 '꺼리다'의 주관적 심리는 (가)에서처럼 '나(我)'와는 잘 호응하지만 전지적 시점이 아닌 한 '그'와는 잘 호응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비해 '꺼려하다'로 바꾸면 화자가 객관적 거리를 가지고 '그'의 심리상태를 판단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동사+-어+하다'의 사례는 흔치는 않지만 그것대로의 구실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이를 비규범이라 해서 버리는 것은 우리말 영역을 스스로 축소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표현이 문법의 영역으로 들어오기에는 (문법은 일반이론이라는 점에서) 아직 일반화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는 거기 가는 걸 꺼려했다"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전통적 표현인 "그는 거기 가는 걸 꺼렸다"와의 통사적,의미적 차별화가 선행해야 하는데,'심리적 객관화' 효과를 언중이 공통적으로,일반적으로 느낄지는 의문이다.

'내키다'는 전통적으로 '(그가) 술이 내키다' '(그가) 술이 내키지 않다'처럼 써오던 자동사이다. 이것을 '내켜하다'란 말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타동사화해 쓰곤 하지만,그렇다고 실제로 이런 말에 '타동성'이 있느냐 하는 점도 문제다.'내키다'이든 '내켜하다'이든 이 말의 의미자질은 '정신적 과정(mental process)'에 불과할 뿐 '물리적 움직임(physical action)'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도 굳이 자동사 '내키다'를 '내켜하다'로 바꿔 타동사화해 쓸 이유를 찾기 힘들다.

형용사에 접사 '하다'를 붙이면 의미가 바뀌거나 품사가 바뀐다(가령 '좋다-좋아하다' 같은 것). 이는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법 범주에 들어왔다. 동사 '꺼리다'와 '꺼려하다''내키다'와 '내켜하다' 사이에는 아직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적·통사적 차이를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동안 합의해온 쓰임새를 벗어난 '꺼려하다' '내켜하다'를 구태여 도입할 필요성이 있을까.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