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1] 아래의 세 <제시문>의 논지를 각각 요약하시오.

[문제2] 아래의 세 제시문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입장에서 다른 두 입장을 비판하시오.

[문제3] 아래의 <자료 1>과 <자료 2>는 역사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세 제시문 중 하나에 근거하여 설명하시오.

[문제4] 아래의 세 <제시문>에 나타난 인식의 객관성 또는 상대성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에 대한 이해'와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논술 길잡이] 성균관대 2008학년도 수시2학기 모의 논술고사(인문계)
[논술 길잡이] 성균관대 2008학년도 수시2학기 모의 논술고사(인문계)
<제시문 1>

일어난 사건들 그 자체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인식 이전에 이미 어떤 형태로든 완성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 세계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역사 세계를 기술하는 진술들은 존재했던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낼 때에만 참이다. 역사 탐구자는 탐구 과정에 개입되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이나 사회적 제약을 통제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낼 수 있다. 이러한 역사 탐구의 근본 원리들을 따를 경우,역사를 탐구하는 자는 비록 그 자신도 역사의 흐름 속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을 초월하여 역사 세계를 객관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주관적,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역사 탐구자는 그런 제약을 배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으며,또 그럼으로써 과거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랑케(Leopold von Ranke)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는 과거를 심판하고 동시대인에게 미래의 행복을 제시하는 임무를 수행해왔다. 그렇지만 현재의 연구는 그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며,실제로 본래 있었던 그대로의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와 같은 역사관의 인식론적 기초는 수동주의 혹은 축적주의라 할 수 있다. 수동적 인식론은 인식주관으로부터 독립된 사물의 존재와 순수한 관찰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참된 지식이란 우리의 감각 경험을 통해 들어오며,흡사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상으로 비추듯 우리의 감각은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때 오류는 전적으로 인식 과정에 개입되는 우리 주관의 편견이나 욕망에 의해 사물의 상이 찌그러져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류를 피하는 최선의 길은 우리 자신의 개입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남는 것이다.(중략) 증거는 역사 세계가 남긴 자료들이다. 증거에 의해 역사 세계는 시간을 넘어 존속한다. 그러므로 증거는 역사 세계의 정보를 제공하며 이것에 의해 역사 서술이 가능해진다. 역사 서술은 다시 증거에 의해 입증되어야 하고,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 세계가 재현된다.

<제시문 2>

과거는 완벽히 복제될 수 없으며 또다시 재구성될 수 없기 때문에,'모든 역사 구성은 필연적으로 선택적이다'라는 원칙은 너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 원칙에 따라 사실들의 선택을 규제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과거의 사건에 부과되는 비중을 결정하며,또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생략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아울러 선택된 사실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배열될 것인가도 결정한다. 게다가 사실의 선택이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여긴다면,우리는 모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쓰며,또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사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역사는 동시대인들이 현재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에 대한 기술(記述)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중략)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보아도,역사 서술에서 사용되는 개념 자료들이 역사가 쓰여진 그 당시의 개념 자료들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주요한 원칙들이나 가설들에 대해 유용한 자료는 바로 역사적 현재가 공급한 자료들이다. 문화가 변화하듯이 한 문화에서 지배적이었던 개념도 변화한다. 당연히 자료를 검토하고 평가하고 정리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 생겨난다. 바로 이때에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 이와 같이 어떤 특정한 개념들은 어떤 특정한 시기의 문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이미 완성된 상태의 과거에서 발견되는 '사실들'이 과거의 사건을 구성하기 위하여 적용된 특정한 개념들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견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제시문 3>

역사란 유전자처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억장치다. 기억이란 유전자 정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현재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잔상들이거나 그것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기억이라면,우리의 집단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다. 기억 상실증에 걸리면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것처럼,한 민족이 자기 역사를 빼앗기면 신채호나 박은식의 말처럼 국가의 혼과 정신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란 나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누가 우리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다. 우리의 기억이 역사가 되면서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역사가 정의한다는 것은 순환논법이다. 기억하기 위해 역사를 쓰는가 하면,역사를 통해 기억이 만들어진다. 기억과 역사 가운데 무엇이 우선하는가는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일단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출발점으로 해서 사고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의 기억이 역사가 된다기보다는 역사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코드라는 것이다. 역사라는 코드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자연적 유전자가 아니라 교육에 의해 주입된 '문화적 유전자'이다. 미국의 역사가 월리엄 맥닐 말대로 '인간을 진정한 사회적 동물로 만드는 것은 집합적 기억으로서 역사'라는 '문화적 유전자'다.

그렇다면 역사학에서 문제는 사회적 기억으로서 '문화적 유전자'를 누가 어떤 식으로 조합하고 구성하여 교육을 통해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이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썼듯이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한 사회 내에서 또는 국제관계에서 어느 한 집단이거나 특정 국가가 현재와 미래의 지배자가 되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날조하는 것이 역사라는 내레티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