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버즈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17) 비싼 신호여야 신뢰할 만하다
전설적인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딘. 영화 '이유 없는 반항'(1955)은 그에게 시들지 않는 청춘이라는 이미지를 남겼다. 영화의 한 장면. 고독한 고등학생 짐(제임스 딘)은 경찰서에서 알게 된 주디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약간 불량한 여자친구에게는 버즈 일당이라 불리는 불량배 친구 패거리가 있었다. 용감한 짐은 승부를 낼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린다. 순진한 '고딩'에 불과한 짐에게 불량배들이 제안한 게임은 그 유명한 치킨게임. 동시에 벼랑으로 차를 몰다가 가장 마지막에 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이긴다. 우리의 짐은 벼랑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뛰어내렸지만 결국 용감하기만 한 버즈는 벼랑에 떨어져 죽어버린다.

◆현명한 사자

가젤이라는 영양은 아프리카에서 무리를 지어 산다. 풀을 뜯으면서도 가젤들의 눈은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배고픈 사자가 건너편 풀숲에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의 이두박근에 잔뜩 힘이 들어가면서 게임은 시작된다. 대부분 영양들은 사자의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내지른다. 이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가젤이 등장한다. 사자를 앞에 두고 껑충껑충 높이 뛰기만 한다. 전속력으로 줄행랑을 치는 가젤 무리 속에서 이 무모한 가젤은 바로 눈에 띈다. 사자는 이런 가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조롱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밀림의 왕 사자는 자존심도 버리고 내빼는 녀석들의 뒤만을 쫓는다.

◆불편한 패션을 선호하는 여성들

이슬람권 여성들의 상징으로 알려진 베일은 종류가 다양하다. 이란에서는 스카프를 두르는 정도로 개화되었지만 탈레반은 온몸을 가리는 포대기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서유럽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이 베일의 금지나 허용 여부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될 만큼 여성의 베일은 이슬람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런데 이 베일은 이슬람이 창안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동로마 제국에서 유행한 문화를 이슬람이 흡수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패션은 모든 문명권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 중국의 전족은 신체를 변형하기 때문에 히잡(hijab)보다 훨씬 억압적이다. 여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학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동의나 심지어는 경쟁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명백한 패션들은 한가지 신호로 수렴한다. 이렇게 불편한 복장을 하고는 도저히 노동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나돌아다니기도 힘들다. 어릴 때부터 이런 패션에 익숙할 만큼 고귀한 출신이라는 뜻이다. 온갖 색으로 치장한 현대 여성들의 긴 손톱도 최소한 육체노동자는 아니라는 간접적인 신호라고 해석된다는 것. 물론 현대 이슬람의 복장 규율은 자발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전통을 고집하는 근대 이슬람 정부들이 여성들의 '불편하기 경쟁'을 지나치게 미화한 결과라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200년쯤 뒤 전통을 고집하는 정부가 여성들에게는 긴 손톱만 허용한다고 법을 만들어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자의 딜레마

사자 앞에서 껑충껑충 뛰기만 하는 가젤의 속셈은 무엇일까? '나는 네가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잘 뛸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쫓아와도 나는 살지만 너는 오늘 허탕을 치고 주린 배를 감싸쥐고 잠들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를 쫓지 말라.' 이런 설득력 있는 타협안을 몸으로 제시하는 중이라고 한다. 문제는 사자 입장에서 이 타협안을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뜀뛰는 가젤이 허풍꾼이라면 이 가젤을 잡는 게 가장 쉽다. 그러나 이 가젤이 무리 중에서 가장 잘 뛰는 놈이라면 사자는 정말 허탕을 칠 가능성이 크다. 새끼 하나 잡는 것도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은데 가장 잘 뛰는 놈을 골랐다가는 힘만 빼고 굶기 십상이다.

사자가 확률을 배웠을리 없지만 어디에 승부를 걸어야 할까? 꽁무니를 빼는 영양의 뒤를 쫓는 사자의 선택은 합리적이다. 사자나 영양이나 사냥과 도망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일상이다. 허풍이 전략인 가젤이 있다면 그는 한두 번 허풍으로 재미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자 중에는 복잡한 신호의 의미를 읽지 못하는 녀석들도 있기 마련이다. 단순한 사자를 만났을 때 허풍의 대가는 죽음이다. 반복되는 게임을 통해 습관적인 허풍꾼은 차츰 사라질 것이다. 사자의 눈앞에서 지금 뜀을 뛰고 있는 가젤은 허풍꾼이 아닌 진짜 선수라고 추정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신뢰할 만한 신호의 조건

말도 안 되지만 가젤과 사자가 서로 말할 수 있다고 해보자. 풀숲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사자에게 가젤들이 한 마리씩 자기 PR 시간을 갖는다고 상상해 보자. 왜 나를 쫓아오면 손해볼 수밖에 없는지 웅변으로 사자를 설득해야 한다. "나는 가젤육상학교를 졸업했고 초원 육상대회에서 입상을 했고 지난번 사냥에서도 사자가 나를 쫓아왔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는 둥 장광설을 늘어놓을 것이다. 뜀을 뛰는 메시지보다 직접적이며 훨씬 분명하다. 사자는 이 메시지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다. 말로 하는 메시지는 직접적이지만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로 하는 허풍에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자가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아마 가장 허풍이 그럴듯한 놈에게 먼저 달려들 것이다. 허풍에 목숨 거는 놈일수록 사자를 설득해야만 살아남을 만큼 허약체질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호가 직접적이냐 아니냐는 신뢰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신호에 비용이 얼마나 들어갔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사자 앞에서 뜀을 뛰거나 무거운 깃털을 달고 나는 것은 그 자체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만큼 신뢰성이 높다.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흉내조차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허풍의 대가가 클수록 신호의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 대가가 죽음이나 파산이라면 허풍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몰락해갈 것이다.

◆주디의 이익

'이유 없는 반항'에서 여자 친구 주디는 자기를 놓고 벌이는 남자들의 치킨게임을 말려야 할까? 두 남자 중 한 남자만을 고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이 게임은 나름대로 효율적이다. 두 친구가 싸움으로 결판을 낸다면 승자도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두 남자 모두 우수할수록 주디가 얻게 되는 승자는 망가진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말로 결판을 내면 아무도 다치지 않지만 주디 입장에서는 남자들의 수다를 믿기 어렵다. 비용이 많이 드는 신호를 요구해야 한다. 벼랑으로 차를 몰아 가장 아슬아슬하게 살아남는 남자는 용기도 뛰어나지만 운동신경과 지능도 뛰어날 것이다. 승자는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으니 일석이조다.

영화에서처럼 한쪽이 죽는 경우는 치킨게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또 가끔 발생해 주어야 게임의 신뢰성도 올라간다. 보통은 열등한 쪽이 게임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드물다. 그러나 10대들의 신호 보내기 게임이 문화적인 방식을 활용하며 다양한 장르를 통해 이루어지는 어른들의 그것보다 훨씬 원초적이고 가혹한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한다.

◆교복과 남녀 분반으로 돌아가는 미국

최근 미국에서는 남녀 분반이나 남녀 차별 학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그간 공립학교의 남녀 구별은 차별이라고 하여 법으로 금지되어왔다. 교복 착용과 함께 남녀 분반 수업같이 전통적인 학교 정책이 새롭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학업 성취도를 높인다는 실증적인 결과 때문이라고 한다. 교복이나 남녀 분반을 억압으로 보기 시작한 한국과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다. 학생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복잡한 논리들이 충돌하는 이슈다. 학생처럼 자율학교의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slowforest@eduhankyung.com


▶학생글 배진현(명지외고 2학년)

교복 자율화와 남녀 합반은 학생들에게 성적 이외에 자신의 능력과 지위를 확실하게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열어주었다. 예전에는 똑같은 교복을 조금씩 바꿔 입는 것만이 가능해서 교복을 통한 개성 표현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명품을 주렁주렁 걸고 나타나는 것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성끼리 있을 때에는 외모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이성과 있으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외모 등 다른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자연스럽게,학생들은 자신이 다른 급우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했고,학업은 뒷전이 되었다.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학생들이 비싼 옷값을 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당위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교복 착용이나 남녀 분반은 사회 평등을 저해하는 명백한 악습이다. (…) 학교 제도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남녀 합반이나 복장 자율화가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이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