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나온 광고 카피로 불후의 명작이라 할 만한 것 중에 '맞다,게보린'이란 게 있어요. 80년대 나온 이 광고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 약은 지금 두통약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맞다,게보린'은 상업적으론 성공했지만 우리말에는 쉽지 않은 숙제를 남겨놓았습니다."

최근 열린 한 모임에서 정희창 국립국어원 연구관은 '신문방송 언어와 문법'이란 주제로 우리말의 실태를 찬찬히 짚어 나갔다. 이 자리에는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 강사와 시인,사전편찬 전문가,언론사 기자들이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관심사는 하나였다. 우리말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들,그 중에서도 규범엔 어긋나지만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표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맞다'는 동사입니다. 우리말에선 동사가 '현재의 사실을 서술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전통적으로 '-ㄴ다' 또는 '-는다'를 붙여왔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아이가 밥을 먹는다' 같은 형태입니다. '(무엇을)하고 있다'란 뜻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맞다,게보린' 역시 문법적으로는 '맞는다,게보린'이 돼야 하지만 어째 그렇게 해선 영 말맛이 안 납니다.

▶그렇습니다. 형용사인 경우는 '물이 맑다'처럼 그냥 '-다'꼴로 씀으로써 '-는다'를 붙여 쓰는 동사와 구별해 왔지요. 사실 동사에서도 '-다'를 서술어미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이는 '한국 축구,아시아를 제패하다'라는 것처럼 일기장이나 신문 기사의 제목 등에서 간접적으로 청자나 독자를 염두에 둔 상황일 때 쓰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맞다,게보린'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요즘 '네 말이 맞는다'라고 하는 것도 '네 말이 맞다'라고 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규범적으론 '네 말이 맞는다'가 바른 표현인데도 말이죠.

▶사전의 탓도 있다고 봅니다. <표준 국어대사전>에는 '맞다'의 용례에 '네 말이 맞다'와 '네 말이 맞는다'가 함께 올라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 동사이면서 형용사적 쓰임새를 갖는 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말에 형용사와 동사의 경계선 상에 있는 말들이 꽤 있습니다. 한 가지 대안은 이런 쓰임새를 보이는 단어군(群)을 따로 분류해 '(예외적으로)언어의 이러이러한 현상이 있다'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입니다. 문법에 얽매여 옳다 그르다로 나눌 게 아니라 현실의 쓰임새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요즘 흔히 쓰는 '건강하세요,행복하세요' 같은 표현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이미 상당히 굳어진 표현 방식이 됐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본래 '건강하다'나 '행복하다'는 분명히 형용사라 기원이나 명령,청유형의 표현이 불가능한 게 전통적인 기준이었는데 지금은 이것이 무너졌어요.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건강하거라'라고 하고 학교에선 교훈으로 '성실하자'란 표현을 자연스럽게 씁니다.

▶문제는 이런 표현을 규범이란 잣대로 무조건 막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언어생활에서 많이 쓰고,역으로 문법에 맞게 '건강해지세요' 또는 '건강해지거라' '성실해지자'라고 하는 말은 오히려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 문법의 한계이지요.

▶얼마 전엔 TV에서 '야채 가지러들 어디까지 가시나 그래? 아니 파도 직접 기르시나?'란 대사가 나오더군요. '가나' '기르나'는 하대하는 말투라 본래 존칭을 나타내는 '-시'와 같이 쓰지 못하는 자리인데,실제론 자연스럽게 많이 씁니다. 이런 것도 문법엔 어긋나지만 딱히 잘못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아랫사람이긴 하지만 존대의 의미를 담기 위해 쓰는,비교적 새로운 경향의 표현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진화 과정에 있는 표현들이 많은데, 이들은 규범이란 잣대로 들여다봐선 해결이 안 됩니다. 문법 그 너머의 말들인 셈이죠. 문제는 말과 글이 본질적으로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문법이란 틀이 있어서 이를 무시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권위 있는 기관에서 잠정적으로나마 현실언어에 대한 재조명이 시급한 때입니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